[라이프] 샤넬 지키는 장인 정신, 장인 지키는 샤넬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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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19구의 랜드마크인 ‘르 19엠(Le 19M)’은 프랑스 패션업계의 내로라하는 공방과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자수·구두·금세공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 약 700명이 이곳에서 섬세한 손끝으로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곳을 짓고 운영하는 주체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 ‘샤넬’이다. 샤넬의 장인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 르 19엠을 중앙일보가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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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19구에 있는 샤넬의 장인들이 모여있는 곳, 샤넬 르 19엠(Le 19M). [사진 샤넬]

19구는 파리 중심부에서 차로 30분 정도가 걸리는 외곽 지역에 있다. 지난달 24일 오전 19구로 진입해 한적한 길을 따라 들어가자 길게 뻗은 하얀 콘크리트 선이 실처럼 얽혀 건물 외벽을 장식한 르 19엠의 모습이 드러났다. 연면적 2만5500m² 규모의 삼각형 구조 건물은 중앙 정원과 어우러져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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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르 19엠(Le 19M)은 유명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의 설계로로 태어났다. 하얀 실처럼 보이는 콘크리트 구조물 231개를 세워 건물 파사드를 꾸몄다. [사진 샤넬]

이곳은 ‘장인 정신에 입각한 하우스의 뿌리를 지키자’는 샤넬의 철학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2020년 샤넬은 프랑스 남부 뮤셈 박물관으로 건축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는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의 설계로 르 19엠을 세웠다. 이름의 19는 위치 파리 19구와 가브리엘 샤넬의 생일 19일을 의미한다. M은 숙련된 장인의 예술적 수공예를 의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패션을 뜻하는 모드(Mode) 등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샤넬은 이곳에 하우스 소속의 40여 개의 공방 중 11개 공방을 모았다. 르사주 앙테리어(Lesage Intérieurs)와 자수 예술 학교를 포함한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자수 공방 몽텍스(Montex), 슈즈 공방 마사로(Massaro), 깃털·플라워 공방 르마리에(Lemarié), 모자 공방 메종 미셸(Maison Michel), 플리츠 공방 로뇽(Lognon), 특수 원단 제조 공방 팔로마(Paloma), 금세공 공방 구센(Goossens) 등이다. 최근엔 독창성과 독보적 노하우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란제리·수영복 브랜드 에레스(Eres)도 합류했다. 샤넬은 매년 공방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공방 컬렉션’을 만들어 발표하고, 이곳에서 쇼도 연다.

2022년 1월, 르 19엠의 개관식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도 참석했다. 프랑스의 전통 기술과 장인 정신이 이어질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을 기뻐하며 이곳의 탄생을 축하했다. 르 19엠은 일반인에게도 열려있다. 작업이 진행되는 공방엔 들어갈 수 없지만, 1층에 마련된 카페와 갤러리엔 언제든 자유롭게 찾아와 샤넬 공방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한 땀 한 땀...장인 손끝서 피어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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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공방 중 자수 공방인 몽텍스 장인의 작업 모습. [사진 샤넬]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공방 곳곳에서 오래된 도구와 기록물들, 그리고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는 장인들이 보였다.
구두 공방 마사로는 1894년 시작한 유서 깊은 공방으로, 가브리엘 샤넬을 위한 투톤 슈즈를 처음 개발한 곳이다. 1957년 당시 유행하던 뾰족한 뒷굽의 스틸레토 힐 대신 6cm 높이의 미드 힐을 장착하고, 앞코를 검정 새틴으로 감싼 베이지색 염소 가죽 구두다. 투톤 슈즈는 발이 편하면서도 작아 보여 디자이너 샤넬뿐 아니라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았다. 마사로의 한쪽 공간엔 19세기부터 사용한 라스트(구두골)과 정형 도구들이 보관돼 있어 이들의 오랜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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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공방에 소속된 구두 공방 마사로. [사진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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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로의 구두 장인이 작업하는 모습. [사진 샤넬]

몽텍스는 샤넬 크리에이션 스튜디오와 협업해 자수 제품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1949년 시작한 몽텍스는 2011년 샤넬 공방에 합류했고, 이후 레디-투-웨어와 오뛰 쿠튀르 컬렉션에 수많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공방에선 이번 2024 가을-겨울 레디-투-웨어 컬렉션에서 선보인 자수와 패치워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얇은 망사 위로 장인의 손이 움직이면 가죽 조각과 반짝이는 스팽글은 꽃이 되어 피어났다. 장인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40년 넘게 자수를 놨다”는 장·노년층에서 팔에 문신을 한 젊은층까지 여러 세대가 모여 있다.
 이들 공방이 샤넬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샤넬의 일을 하지만,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기도 하고 다른 브랜드를 위한 제품 제작도 한다.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한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진가를 알리고 싶다는 샤넬의 공간 기획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프랑스 장인의 노하우를 보존·계승하는 공동체. 이것이 르 19엠의 의미이자 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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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공방 몽텍스의 장인이 가죽 조각을 한 땀 한 땀 이어 붙여 작품을 만들고 있다. [사진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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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텍스 장인이 스팽글로 수놓은 꽃 모티브들. [사진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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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텍스의 자수를 사용한 샤넬의 2024/25 가을-겨울 레디-투-웨어 컬렉션 재킷. [사진 샤넬]

공방 중요하게 여긴 코코 샤넬  

샤넬은 왜 공방과 장인 지키기에 나섰을까. 샤넬과 공방의 관계는 샤넬의 창립자이자 전설적인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브리엘 샤넬은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파리의 마사로·르마리에·구센 등 여러 공방과 협업했다. 창의적인 완벽주의자였던 디자이너 샤넬은 각 공방의 장인들이 가진 실험 정신과 완벽을 향한 열망을 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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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5 샤넬 가을-겨울 레디-투-웨어 컬렉션. [사진 샤넬]

1980년대 그와 거래하던 몇몇 공방이 재정 및 후계 문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가브리엘 샤넬은 각 공방의 유지를 위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1985년부터 ‘샤넬 공방’의 이름으로 거래 공방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지분은 샤넬이 가지고 있지만, 공방들은 안정적 재정 상태와 계약을 통해 작업과 후진 양성에 몰두할 수 있었다. 현재 샤넬 공방은 40여 개의 공방을 운영 중이다. 공방의 장인들은 샤넬을 포함한 전 세계 유명 브랜드를 위해 작업한다.

 샤넬은 자신들이 지켜나가고 있는 장인 정신을 ‘사브아 페어(savoir-faire)’라 부른다. 사브아 페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지식이나 재치를 뜻한다. 샤넬은 트렌드를 좇는 대신 혁신을 꾀한다.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킨 가브리엘 샤넬의 패션 철학은 지금 르 19엠을 통해 장인 정신이야말로 미래를 위해 집중해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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