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의료공백 장기화…아동병원, 대형병원 응급실 됐다 [위협 받는 소아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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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기도 소재 아동병원에 지난달 14일 응급 소아환자가 들어오고 있다. 사진 병원 제공

지난 10일, 경기도 소재 A아동병원에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생후 5개월 아기가 보호자 품에 안겨 들어왔다. 미숙아로 태어난 이 아기는 폐가 손상된 기관지폐이형성증 등의 기저질환을 갖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숨을 안 쉬는 순간이 서너 차례 찾아온 응급 상황이었다. A병원 의사는 아이가 순식간에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 중증 진료 시설이 잘 갖춰진 서울의 B상급종합병원으로 이송시켰다.

하지만 B병원은 급한 약물 처치만 한 뒤, 아이를 다시 A병원으로 돌려보냈다. "인력이 부족해 아이를 입원시키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A병원장은 "우리 병원은 인공호흡기도 없어 응급 환자를 받는 게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다른 큰 병원을 찾자니 환자를 두고 '핑퐁게임'을 벌이는 꼴이라 고민 끝에 수용했다"면서도 "이런 상황엔 혹여나 아이가 잘못될까 봐 의료진 전체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중증·응급 진료 장비와 의료진이 부족한 아동병원들의 '소아응급실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의료공백 장기화 속에 소아진료체계 전반이 흔들리면서 대형병원 응급실 역할을 대신하는 아동병원이 늘어나는 것이다. 앞으로 '필수의료'로 꼽히는 소아청소년과 인력 부족 등으로 진료체계가 더 불안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동병원은 대개 동네 소아과 의원보다 크지만, 대형 종합병원보다는 작은 2차 의료기관을 말한다. 이들 병원은 '응급환자 분류도구(KTAS)'(총 5단계)에서 상대적으로 경증인 3~5등급에 해당하는 환자를 주로 진료하고, 보다 고난이도 검사·치료가 필요한 1~2등급 환자는 3차 병원으로 이송하는 식이다.

하지만 소아과 전공의들이 지난 2월 집단 사직에 나서는 등 대형 병원의 소아 응급 진료 기능이 크게 흔들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가뜩이나 사람이 부족했던 소아과에 비상등이 들어오면서 아동병원이 중증이거나 응급 상황인 환자를 떠안는 상황이 나오게 됐다. 이홍준 대한아동병원협회 부회장(김포 아이제일병원장)은 "전공의 사직 이후 전문의들이 지쳐가던 4~5월쯤부터 3차 병원에서 아동병원으로 거꾸로 전원을 의뢰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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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디자이너

이에 따라 전국 아동병원 10곳 중 9곳은 한 달에 최소 1건 이상의 응급환자를 수용하고 있다. 아동병원협회가 지난달 27~29일 회원 병원들을 조사(50곳 참여)한 결과, 구급차로 내원하는 소아 환자가 한 달에 1건도 없다는 병원은 12%에 불과했다. 78%가 월 1~10건, 10%가 11건 이상의 응급 환자를 받고 있었다. 한 달에 120건의 응급 환자를 받았다는 병원도 한 곳 있었다.

치료가 어려운 환자를 상급종합병원으로 옮기기도 쉽지 않다. 원장들이 일일이 전화를 돌려서 받아줄 병원을 직접 물색할 정도다. 익명을 요청한 아동병원장은 "환자를 상급병원으로 보내려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 사방에 1시간 동안 전화를 돌려야 한다"면서 "그마저도 아이가 그쪽 병원에 도착할 때 살아있을 거라고 보장해줘야 받아준다. 그보다 위급한 환자들은 위험 부담 때문에 아무도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협회 설문에 따르면 아동병원 72%가 구급차로 내원한 응급 환자를 상급병원으로 이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대형병원의 진료 기능이 빠르게 회복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의료공백 사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데다, 소아과 기피 현상은 갈수록 심해져서다. 저출생으로 인한 진료 수요 감소 전망, 의료 소송 부담 등으로 소아과를 전공하려는 젊은 의사는 점점 줄고 있다. 올해 상반기 레지던트 모집에서 소아과 지원율은 26%(정원 205명·지원 53명)에 그쳤다. 그나마도 이들 중 대다수는 의정갈등을 타고 병원을 떠났다. 사태가 해결돼도 소아과 같은 필수과 전공의들은 쉽게 복귀하지 않을 거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인력·장비 모두 모자란데 응급·중증환자가 늘어나는 아동병원 사정은 더 어렵다. 이홍준 부회장은 "소아과 의사 공급 자체가 적다 보니 아동병원은 신규 의사를 채용하기도 어렵다"면서 "(응급실처럼) 야간진료를 하고 싶어도 의사가 없어서 못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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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찾은 경기도 김포 소재 한 아동병원이 환자와 보호자들로 붐비는 모습. 남수현 기자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들도 불안한 의료체계를 피부로 느낀다. 지난 9일 경기도 한 아동병원에서 만난 25개월 아기 엄마 임모(35)씨는 "아이가 새벽에 열이 끓는데 '너무 어리다' 등의 이유로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수소문 끝에 1시간 넘게 떨어진 병원에 갔던 기억이 있다"며 "아동병원이 그나마 있어 다행이지만, 여기서도 환자를 받기 어려워지면 급할 때 갈 곳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손주를 병원에 데려온 김모(61)씨도 "아동병원은 늘 대기가 많아 몇 시간씩 기다린다"면서도 "여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일"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소아진료 공백 완화 대책으로 '지역협력체계 구축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같은 지역 내 소아과 의원-아동병원-상급종합병원 등이 서로 신속하게 협력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여기에 연간 약 2억원의 지원금을 주는 사업이다. 협력체계를 꾸린 의원·병원들은 의료진 간 직통 연락망을 구축하게 된다. 소아의료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지역 내 소통망이라도 촘촘히 짜서 '응급실 뺑뺑이' 같은 진료 공백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최근 시범사업 참여 공모를 마감했고, 심사 절차를 곧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동병원협회는 응급·중증인 소아 환자 이송과 관련해 소방청과의 대응 체계 마련 등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복지부 관계자는 "권역별 광역응급의료 상황실을 통한 전원 지원 등 방안이 있을 수 있지만,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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