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침이슬' 보다 맑고 순수했던 영원한 청년 김민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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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불렸던 고 김민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침이슬'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소극장 학전 대표 김민기가 21일 별세했다. 73세.
공연예술계에 따르면, 그는 전날 지병인 위암 증세가 악화해 세상을 떠났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 숱한 명곡을 남긴 고인은 1991년 대학로에 학전을 설립하고 수많은 신인 배우와 작가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하는 등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가수 고(故) 김광석, 고(故) 유재하 등이 이곳에서 공연했고, 배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조승우·장현성·이정은과 재즈 뮤지션 나윤선 등이 고인이 제작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무대를 거쳐갔다.

대중문화의 산실이었던 학전은 지난 3월 만성적인 재정난과 김민기의 건강 문제 등으로 33년만에 폐업했다. 4월 방송된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에선 암 투병 중에도 학전 폐업 전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러 온 김민기의 모습이 담겼다. 영상에서 그는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소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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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열린 학전 마지막 콘서트. 사진 학전

고인은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배우와 가수 뒤에 선 스스로를 ‘뒷것’이라 불렀다. 그의 노래는 수많은 장소에서 불려졌지만, 고인은 “노래는 결국 향수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며 노래로 돈을 벌 생각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학전 폐업 때 1억원 이상을 기부한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평소 주변인들에게 김민기를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묵묵히 책임만 감수하는 순수하고 맑은 시인”이라고 말해왔다. 고인의 서울대 후배이기도 한 이수만은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는 등 고인과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김민기는 1951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엔 서울로 이주해 재동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엔 미술과 음악에 몰두하며 보냈다. 기타를 잡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1968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후에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동창생인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와 듀엣 ‘도비두’를 결성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인 1970년, 가수 양희은을 만나 ‘아침이슬’을 지어 줬다. 1971년 발매한 본인 앨범에도 수록한 ‘아침이슬’은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지만, 1975년 금지곡에 묶인 시대의 아픔이 담긴 노래다. 김민기는 반지하 창고의 개인 작업실에서 ‘나의 시련’이란 가사가 떠올라 이 노래를 쓰게 됐다고 한다.

1977년 제대 후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상록수’를 만들었다. 1984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결성해 프로젝트 음반을 발매했다. '노찾사' 출신의 포크 가수 권진원은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엔 어떤 고결함과 숭고함이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쓴 노래엔 사랑이란 가사가 없다. 노랫말엔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고인이 쓴 노래 대부분은 '운동권 가요'로 불리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가,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전부 해금됐다. 금지곡 시절엔 불온한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 검찰, 보안사, 안기부 등에 연행돼 숱한 고초를 치렀다. 고인의 가수 생활은 외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였다.

고인은 1998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운동을 염두하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다. 심정적 동조는 했더라도 집단적 운동은 내성적인 나에겐 맞지 않는다”면서도 “수용자들이 시대 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내 노래가 그들에게 공명돼 그들을 위로했다면 다만 영광일 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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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학전 신년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고 김민기. 사진 연합뉴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김민기 이전에는 청춘의 사실적 의식을 대변하는 노래가 없었다. 1971년 낸 그의 유일한 앨범이 지금까지도 엄청난 의미를 갖는 이유는 포크 문화의 개화와 융성을 주도한 사실상 싱어송라이터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넉넉한 목소리에 깊은 음색이 있는 뛰어난 보컬리스트인데 그의 성향과 시대적인 여러 이유로 대중이 그의 목소리를 많이 듣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최영균 대중문화평론가는 고인에 대해 “대중문화예술업 종사자의 처우까지도 신경 썼던, 문화예술 제작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라며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예술가이자 위인”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와 이듬해 마당극 '아구' 제작에 참여하는 등 연극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1978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시작으로 1983년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등을 연출했고, 1991년 대중문화의 뿌리가 된 소극장 학전을 대학로에 개관했다.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역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공연을 올리며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고인은 독일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번안한 이 작품으로 독일 문화훈장인 ‘괴테 메달’을 받기도 했다

김민기는 2008년 '지하철 1호선'의 4000번째 공연을 올렸을 당시를 학전 역사의 가장 의미 있는 순간으로 꼽았다. 고(故) 김광석은 학전이 배출한 최고 스타였고, 윤도현·나윤선·정재일 등 뮤지션들이 학전 출신으로 성장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걸출한 연기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어린이극 '우리는 친구다'(2004), '고추장 떡볶이'(2008) 등을 연출했다. 지난 3월 학전이 문을 닫으며 고인이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은 '고추장 떡볶이'가 됐다. 그는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전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어린이 뮤지컬을 만든 이유에 대해 그는 2018년 JTBC 뉴스룸에서 “초등학생부터 청소년이 볼 수 있는 공연이 필요하다. 어른을 위한 공연을 만드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라며 “돈이 안 되는 걸 알지만 작정하고 했다”고 말했다. 고인의 음악인생을 종합한 연구서 『김민기』를 낸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는 그에 대해 “시대의 영웅 혹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미래를 만들어갔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빈소는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미영 씨와 2남이 있다. 24일 오전 5시 30분 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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