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아내는 딴 남자 애를 뱄다…'첩의 아들' 박헌영 가혹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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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더중플 -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타협 없이 대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은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하던 해방정국 풍경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 제 5부 '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입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인물 가운데 공산주의자 박헌영(1948~1953)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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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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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광복 직후 서재에서 생각에 잠긴 박헌영. 중앙포토

역사학 가운데 인물사 또는 전기학은 연구가 어렵다. 문중의 시비, 지역감정, 종교적 호교론 때문이다. 이 셋 중 어느 하나만 감정을 건드리면 사자명예훼손죄(형법 308조)로 고소당할 수 있다. 교수가 이런 송사에 휘말리면 고생이 말이 아니다.

박헌영의 경우는 시비의 대상이 조금 다르다. 그의 적이었든, 숭모자였든 생계형의 '꾼들'이 목을 매고 있어서다. 어차피 역사의 좌우익은 불가피하게 나누어지기 마련이지만, 요즘처럼 이렇게 칼로 벤 듯이 갈라져 싸우는 역사업자들도 드물다. 따라서 박헌영을 한국 현대사의 주역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며 용기가 필요하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며 박헌영기념사업회가 생기고 번듯하게 『박헌영전집』(2004)이 출판되면서 그에 대한 편견이 많이 교정됐지만, 여전히 그를 둘러싼 이념적 논쟁은 치열하다. 박헌영에 대한 정직한 논의 없이는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며, 그러한 모험으로 쓴 것이 『한국분단사연구: 1943~53』다.

2000년 7월, 나는 『한국분단사연구: 1943~53』의 마지막 보완작업을 위해 충남 예산군 신양면으로 답사를 떠났다. 그곳은 박헌영의 고향이다. 나는 신양면사무소에서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신청했다. 개인정보 보호가 없던 시절이라 면서기는 쉽게 보여주었다. 제적등본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다. 어머니 이학규의 직업이 '주막업'으로, 박헌영과 아버지 박현주의 관계가 '서자'로 기록돼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가혹한 호적등본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박헌영이 22세 때부터 이 등본을 들고 다녔을 텐데 그 감수성 많은 청년 수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연민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제적등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에겐 이미 배다른 맏아들이 있고, 박헌영 뒤로도 배다른 두 딸이 있었다.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자식을 얻고자 소실을 맞이한 씨받이 같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다. 박헌영은 훗날 "봉건 양반의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는 아마 열등감의 표현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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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 생모는 첩, 직업 주막업 기재 
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결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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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주세죽 부부. 중앙포토

박헌영은 결혼 생활에서도 파란이 많았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일제가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인물"로 평가하며 감시했던 주세죽이다. 부부 사이엔 아이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둘 다 망명과 도피, 투옥을 거치며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날, 박헌영이 오랜만에 아내를 만났더니 배가 불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남편 동지의 아이 가졌다…박헌영 아내의 ‘접촉사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281

박헌영의 몰락 부른 찬탁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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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 일행. 왼쪽 끝에 박헌영이 보인다. 중앙포토

해방이 되자 박헌영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71%가 사회주의 정부를 원했다. 시대는 그의 편인 듯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파동으로 박헌영은 시련을 맞았다. 남한 국민 92%가 반탁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소련의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했다. 남조선에서 그의 정치 생명은 그렇게 끝났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과 견주어 박헌영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스탈린은 박헌영 의심했다…모스크바 면접장서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0

신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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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한 정치학자. 건국대 교수(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정치사』 『전봉준 평전』 『한국분단사 연구: 1943~1953』 『한국정치사상사』 『잘못 배운 한국사』 등을 지었으며, 『군주론』 『한말외국인기록』(전 23권) 『삼국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을 번역했다. 2023년부터 매주 한 차례 중앙일보에 ‘신복룡의 신영웅전’을, 2024년부터 더중앙플러스에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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