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침이슬’로 시대 적시고…대학로 ‘뒷것’ 되어 꿈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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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 이끈 김민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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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으로 투병하다 21일 세상을 떠난 김민기 ‘학전’ 대표. 동료들은 그를 “순수하고 맑은 웃음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했다. [중앙포토]

그의 노래는 울분으로 가득한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연료가 됐다. 본인은 스스로를 ‘뒷것’이라 부르며 드러남을 원치 않았지만, 노래는 제 운명대로 세상의 슬픔과 공명하며 널리 퍼져나갔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아침이슬’)고 노래했던 음유시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소극장 학전 대표였던 김민기가 위암 투병 끝에 21일 별세했다. 73세.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인 김성민씨는 22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댁에서 요양 중이던 선생님의 건강이 19일부터 안 좋아졌고 20일 오전 응급실을 찾았다”며 “병원에 갔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날 오후 8시26분에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갑작스럽게 떠나셨지만 3~4개월 전부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며 “학전과 관련해선 ‘지금 끝내는 게 맞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 숱한 명곡을 남긴 고인은 1991년 대학로에 학전을 설립하고 수많은 신인 배우와 작가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하는 등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가수 고(故) 김광석, 고(故) 유재하 등이 이곳에서 공연했고, 배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조승우·장현성·이정은과 재즈 뮤지션 나윤선 등이 고인이 제작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무대를 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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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학전의 마지막 콘서트 마지막 회차 모습. [중앙포토]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엔 서울로 이주해 재동초, 경기중·고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엔 기타를 치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과 미술에 몰두했다. 1968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후에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동창생인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와 듀엣 ‘도비두’를 결성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고인의 삶은 외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였다. 1970년 가수 양희은을 만나면서 시대를 바꾼 노래 ‘아침이슬’이 탄생한다. 1971년 발매한 그의 앨범에도 수록한 ‘아침이슬’은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지만, 1975년 금지곡으로 묶였다.

‘아침이슬’을 비롯해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고인이 쓴 노래 대부분은 ‘운동권 가요’로 불리며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가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해금됐다. 금지곡 시절엔 불온한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검찰·보안사·안기부 등에 연행돼 숱한 고초를 겪었다. 1984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결성해 프로젝트 음반을 발매했다. ‘노찾사’ 출신의 포크 가수 권진원은 “신기하게도 김민기 선생님이 쓴 노래엔 사랑이란 가사가 없다. 노랫말엔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대의 상징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1998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운동을 염두하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다”며 “수용자들이 시대 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내 노래가 그들에게 공명돼 그들을 위로했다면 다만 영광일 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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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발매된 김민기의 유일한 정규 앨범. ‘아침이슬’이 수록돼 있다. [중앙포토]

그의 예술세계를 지탱한 또 하나의 뿌리는 무대였다. 고인은 1978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시작으로 1983년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등을 연출했다. 소극장 학전에서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공연을 올리며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학전은 지난 3월 만성적인 재정난과 그의 건강 문제 등으로 33년 만에 폐업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배우와 가수 뒤에 선 ‘뒷것’이라 칭했다. 학전 폐업 때 1억원 이상을 기부한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평소 주변인들에게 김민기를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묵묵히 책임만 감수하는 순수하고 맑은 시인”이라고 말해왔다. 고인의 서울대 후배이기도 한 이수만은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는 등 고인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22일 고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의 추모 메시지가 잇따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열정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고 회고하며 “역사는 선생님을 예술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적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빈소를 찾아 “고인이 문화예술을 고집하며 이룩한 것들은 우리의 어마어마한 문화유산이 됐다”고 말했다.

유족은 부인 이미영씨와 2남.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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