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도광산 전시관 가보니, '조선인 강제노동' 표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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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결정”
28일 오전 7시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광산이 있는 아이카와(相川). 신칸센과 배편을 이용해 도쿄에서 5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아이카와에 들어서자 지난 27일 세계유산위원회 결정으로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도광산은 한때 일본 최대의 금광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엔 조선인 약 1500명이 강제 징용됐던 곳이다.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며 일본 정부의 약속에 따라 마련됐다는 조선인 노동자 전시실을 이날 일반공개에 앞서 방문했다. 전시실이 마련된 곳은 아이카와향토박물관으로 한때 일본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건물로 쓰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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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다음날인 28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향토박물관에 강제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된 기록물이 전시됐다. 김현예 특파원

전시관은 박물관 주건물 뒤편에 있는 별관 2층에 있었다.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가로 5.2m, 세로 4.2m의 작은 방이 나타났다. 성인 20명이 들어가면 가득 찰만한 크기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조선인 노동자들이 썼던 나무 도시락통 한 점이 보였다. 전시실의 유일한 ‘실물’ 유물이다. 옆엔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의 생활’이란 이름으로 일본어와 영어로 된 소개문이 벽에 나란히 붙어있었다. 사도광산 등재 며칠 전 황급히 전시실을 마련한 듯 1층 전시 패널과는 다른 디자인이 적용된 게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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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향토박물관에 강제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나무도시락통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기숙사 인근 취사장에서 지은 밥을 이곳에 담아 먹었다. 김현예 특파원

첫 번째 전시물은 ‘징용’에 대한 설명이었다. “전쟁 중 국가총동원법(1938년 발령)으로 1944년 9월 조선에 ‘징용’이 도입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징용’은 법령에 기반해 노동자에게 업무를 의무화한 것으로 위반하면 징역 또는 벌금을 부과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인 노동자 징용이 법률에 의한 합법적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했다. 전시물들은 모두 원본이 아닌 사본을 패널에 붙인 형태였다. 1940~1945년 사이 조선 출신 노동자가 1519명이었다는 기록, 1140명분의 체불임금이 공탁됐다는 문서 사본 등이 제시됐다.

아이카와 지역의 담뱃가게에서 발견된 연초배급 관련 문서 사본엔 당시 조선인 기숙사에 살던 7명이 도주했고, 3명이 형무소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인신 구속 상태에서 노동이 이뤄졌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자료다. 연초배급 장부로 조선인 기숙사로 쓰였던 제1아이카와 기숙사와 제3 기숙사, 제4 기숙사 존재와 함께 그곳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이름과 본적지, 생년월일까지 드러났지만 뒤늦게 일본 정부 인정이 이뤄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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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향토박물관 2층에 마련된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실의 모습. 김현예 특파원

가혹한 노동환경 등을 드러내는 자료도 일부 있었다. 한 달 평균 28일을 일했고, 한명 당 하루 한되 쌀이 지급됐지만, 점차 이를 줄이면서 무와 건면을 섞은 혼식을 했다고 밝혔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조선인의 노동쟁의(1940년 2월)에 대한 경찰 기록, 광산에서 사다리 가설 작업을 하다 2명이 사망했다는 사료가 전시됐다.

암반에 화약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나 목재 작업, 광석 운반일과 같이 일본인에 비해 위험한 작업을 맡겼다는 기록들도 포함됐다. 일본광산협회가 1940년 내놓은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엔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적으로 임금을 저축했고, 자유로운 이동이 금지됐던 부분이 기재됐다. 그 옆엔 액자에 담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의 강제 징용에 대한 “마음 아프다”란 발언이 붙어있었다. 전시 말미에 아이카와에 남아있는 조선인 기숙사 등을 표시해놨지만, 실제 안내판 건립 일정과 내용은 미정인 상태다.

조선인 관리 기록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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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카와 향토박물관' 내 전시물. 사진 외교부

영문 설명이 없는 광산회사의 기록물엔 충청 지역에 집중됐던 등 조선인 노동자들의 출신지, 당시 평균 임금(66.77엔)과 최저임금(4일간 9.18엔), 일본으로 끌려온 뒤 해야 하는 절차 등이 적혀있었다. 일본광산협회의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1940년)’ 자료에 따르면 조선 땅을 출발해 사도에 도착하면 먼저 회사측 설명을 들어야 했다. 이후엔 신사에 들러 고향땅을 향해 잘 도착했다는 인사를 했고, 작업 도구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3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일본 지배를 당하는 국민이라는 의미를 담은 황국신민(皇國臣民) 의무도 부여됐다. 불량 노동자에 대해선 시찰을 하고 경찰과 긴밀히 연락을 한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갱도 내에서 힘이 많이 드는 운송 등의 업무를 시키고, 그 중 특별히 우수한 자에겐 충분히 조련과 지도를 하며,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도 마련됐다

이처럼 전시물은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실태를 드러내는 자료들이 일부 포함됐으나, 일본어는 물론 영문 안내문 어디에도 ‘강제’나 '강제노동'이란 단어는 없었다. 징용의 강제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물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평가도 없었다.

이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한·일 양국이 사전에 ‘강제노동’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현지 전시시설에서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당시 생활상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전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군함도 등재)에 정리됐다”며 “당시 합의는 그대로 있는 것이고, 일본이 그것을 포함해 모든 약속을 인정한 상태"라는 것이다. 일본 언론 보도는 한국이 마치 이번에 강제성은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합의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단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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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중앙일보와 만난 아라이 마리 사도시의원은 일본 정부가 약속한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된 전시에 대해 ″당사자 피해 증언 등이 담긴 영상이 전시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현예 특파원

강제노동에 정확한 표현이 빠진 전시 상황은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반영하자고 주장해온 일본 인사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도광산 조선인강제노동자료집 출간 등에 참여했던 아라이 마리(荒井眞理) 사도시의원은 “이곳에 한 번 끌려오면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인들을)일하도록 한 것은 강제노동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라이 의원은 당시의 실태를 제대로 알리려면 조선인 강제노동 당사자의 증언 영상 등도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자와 후미토시(吉澤文壽) 니가타 국제정보대 교수도 “식민지 지배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전시가 되어야 한다”며 사도 광산 전시물에도 '무라야마 담화' 수준의 인식이 담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1995년 식민 지배와 침략이 한국 등에 고통을 준 것을 인정하면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한 바 있는데 당시 수준의 전시 내용이 필요하단 의미다. 요시자와 교수는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인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며 "우선 전체 역사를 알리는 것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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