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온갖 악재 한꺼번에 맞았다…코스피 2500선 붕괴, 235조원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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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직장인 하 모씨는 “8월이 시작하자마자 ‘검은 금요일(2일)에 이어 ‘검은 월요일(5일)’까지 투자금 수천만원이 이틀새 날아갔다”며 “한반도에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허무하게 손실을 보니 역시 국장(한국 주식시장)에는 투자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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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코스피는 전장 대비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장을 마쳤다. 사진은 이날 여의도 KB국민은행 딜링룸 모습. 연합뉴스

R공포 K-증시 강타…코스피 ‘최악의 날’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가 국내 주식시장을 강타했다. 5일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루치 하락률로는 2008년 금융위기(-10.6%) 이후 최고치이며, 지수 낙폭(234.64포인트)으로는 사상 최고치다. 그야말로 국내 증시는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오전 중 코스피·코스닥 시장에 사이드카가 발동됐고, 오후엔 양쪽 시장에 모두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코스피 시장의 서킷 브레이커는 1998년 도입 이후 6번째, 코스닥은 2001년 10월 이후 역대 10번째다. 대장주인 삼성전자는 전 거래일대비 무려 10.3% 하락하며 7만14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코스피 시가총액은 약 192조원, 코스닥 시가총액은 약 43조원이 날아갔다. 하루 만에 국내 증시에서 235조원이 증발한 셈이다.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 증시도 ‘초토화’됐다. 일본 니케이225와 대만의 자취안 지수는 각각 12.4%, 8.35%씩 하락했다.

전문가들은 미국발 경기침체 공포와 빅테크발 인공지능(AI) 거품론이 시장을 연타하면서 ‘패닉 셀링(투매)’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보복 공격 가능성도 위험 자산 회피 심리에 불을 붙였다. 블룸버그는 이날 “글로벌 주식 하락은 경제 전망, 지정학적 위험, 인공지능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이 기술을 둘러싼 과대 광고에 부응할지 의문에 대한 우려를 반영했다”고 분석했다.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건 지난 4일(현시시간)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고용 보고서다. 7월 미국의 실업률은 4.3%로 전월대비 0.2%포인트 올랐다. 이는 2021년 10월(4.5%) 이후 2년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7월 비농업 일자리는 전월대비 11만4000명 느는데 그쳐 시장 예상치(17만6000명)를 크게 밑돌았다. 임금 상승률도 전년대비 4.8% 증가하는데 그쳐 3년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 미국에서 경기침체의 지표로 쓰이는 ‘샴의 법칙(Sahm Rule)’에 따라 공포감이 더욱 확산했다. 이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이코노미스트였던 클라우디아 샴 박사가 고안한 법칙으로, 미국 실업률의 최근 3개월 평균치가 지난 1년 최저치보다 0.5%포인트 이상 높으면 경기침체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하는 이론이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현재 이 수치는 0.53%포인트에 달한다.

강현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미국은 민간소비가 국가 경제의 70%를 차지하고 민간소비의 60%를 임금이 지탱하고 있어 ‘고용→임금소득→소비→고용’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피드백 작용에 의해 고용 시장 악화가 가속한다”며 “이를 통해 볼 때 미국 경기는 침체의 초입에 있고 최근 나타난 주식 시장의 하락은 이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고 전망했다.

엔비디아가 이끈 AI칩 생태계 ‘흔들’

여기에 엔비디아가 쏘아올린 ‘AI 거품론’도 투심을 급속하게 냉각시킨 요소로 꼽힌다. 4일 로이터는 정보기술 “엔비디아가 설계 결함으로 인해 신제품(B200) 출시를 3개월 이상 지연시킬 수 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메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도했다. B200은 엔비디아의 H100의 성능을 뛰어넘는 차세대 AI 칩이다.

그동안 엔비디아는 고객사에 대한 납품 실적을 앞세워 AI 고점 우려를 종식시키며 관련 업종의 주가를 이끌어 왔다. ‘엔비디아가 멱살 잡고 간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런 대장주의 신제품 출시가 늦어지면, MS·구글·메타의 AI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에도 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 이 제품에 들어갈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를 공급할 예정인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도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 이런 우려로 인해 지난 2일 주요 기술주로 구성된 나스닥 지수는 2.43%, 필라델피아반도체 지수는 5.18% 하락했다.  이 여파로 5일 삼성전자는 10.3%, SK하이닉스는 9.87% 하락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엔비디아 신제품 사이클에 대한 불신이 생기자 그동안 경기 흐름과 무관하게 주가가 올랐던 반도체 공급망 기업의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전체 지수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며 “엔비디아가 2분기 실적발표(28일 예정)에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전까진 반도체 및 한국 증시에 부정적인 영향이 지속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가 2분기 동안 보유하고 있는 애플 지분을 절반 가까이 팔았다는 소식도 빅테크 투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 역시 2일 ‘어닝 쇼크’를 기록하며 주가가 5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美 대선…변동성 커질듯

이런 와중에 투자자들 사이에선 위험 자산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나타나면서 안전 자산인 엔화 가치가 상승하고, 이에 따른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저렴한 엔화로 산 해외 자산을 되파는 현상)이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증시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소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엔·달러 환율 저점이 글로벌 주식시장의 1차 바닥을 결정하는 변곡점이 될 수 있어 환율을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은 금요일’과 ‘검은 월요일’을 잇따라 겪고 난 시장은 향후 전망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삼성증권은 이날 단기(3개월) 주식 비중에 대한 의견을 ‘확대’에서 ‘중립’으로 변경하고, 현금 비중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유승민 삼성증권 글로벌투자전략팀장은 “경기 침체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미국의 경기 모멘텀이 둔화할 것이라는 우려는 당분간 지속할 것”이라며 “이란·이스라엘도 지난 4월보다는 높은 강도의 군사적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인 데다 미국 대선 혼란도 큰 변동성의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증권가에선 현재 국내 기업의 실적과 향후 Fed의 대응 등을 감안할 때 현재의 낙폭은 과도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현재 코스피 지수는 경기 침체 공포 심리의 영향으로 선행 PER(주가수익비율)이 초저평가 권역에 진입했다”며 “경기침체 공포가 진정되는 상황에서 연내 세 번 금리 인하 가능성이 지속한다면 증시에는 우호적인 분위기로 전환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그는 “미국 공급관리협회(ISM) 서비스업 지수나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 등 경기침체와 관련한 지표들을 확인해가며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국내 증시가 이례적인 낙폭을 기록하자 대통령실도 긴급 점검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부터 여름휴가에 들어갔지만 증시 관련 긴급 보고를 받는 등 직접 현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휴가중이던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코스피 폭락 등 긴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복귀했다.
당국은 이날 밤 미국과 유럽 증시 현황을 살펴본 뒤 6일 증시가 열리기 전 경제부총리·한국은행 총재·금융위원장·금감원장이 모이는 거시경제금융회의(F4)를 개최해 시장 안정화에 집중하고, 대통령실은 이를 전반적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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