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영국선 전공의 뽑을 때 인성 검사…자기밖에 모르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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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법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문승연씨를 지난달 29일 서울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전민규 기자

"영국 전공의 시험의 절반은 인성 검사를 기반으로 한 상황판단능력 테스트(SJT)입니다. (성적으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학생이라 해도 나밖에 모르는 인성이나 판단 능력이라고 나오면 백이면 백 떨어집니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 포렌식 법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문승연씨가 말하는 '영국식' 전공의 선발 과정이다. 중학생 시절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 이민 간 문씨는 영국으로 건너가 전공의 수련을 마쳤다. 현재는 왕립교정국(HMP)에서 교도소 수용자와 중대 범죄자에 대한 정신감정 등을 책임지는 의사로 일한다.

지난달 29일 서울을 찾은 문씨를 만나 '한국인 영국 의사'가 보고 겪은 전공의 수련 체계에 관해 물었다. 한국에선 전공의 집단사직에 따른 의료공백이 반년째 이어지면서 수련 체계 전반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힌트'를 얻기 위해서다.

영국은 전공의를 선발할 때부터 한국과 다른 길을 걷는다. 병원별로 지원받고 뽑는 한국과 달리, 전공의 선발을 국가가 직접 담당해서다. 특히 시험의 절반만 임상 의학 지식을 묻는 필기 형식이고, 나머지는 인성을 기반으로 한 상황판단능력 검사로 채워진다고 한다.

문씨는 "의사로서 마주할 수 있는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8~10가지 옵션 중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라는 문제가 수십 개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면접 때도 교수들이 출신 학교나 전국 석차보다는 어떤 사회적인 기여를 해왔는지 중점적으로 본다. 지식은 얼마든지 교육할 수 있지만, 인성이나 의사가 지녀야 할 자질이 없다면 고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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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열린 '사직 전공의들을 위한 근골격계 초음파 연수강좌'에서 참가자들이 강연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합격한 전공의들은 체계적인 수련 과정을 거친다. 모든 전공의가 자신이 진료한 환자 병력 등을 촘촘히 기록하는 포트폴리오를 작성해야 한다. 매년 심사와 동료 평가 등이 이뤄지는데, 부족할 경우 유급될 수도 있다. 문씨는 "4명 중 1명꼴로 유급된다"고 했다.

평가가 철저한 만큼 교육도 꼼꼼하게 이뤄진다. 전공의 1명당 지도교수 5~6명이 붙는다. 교수진엔 일주일에 1시간 이상을 전공의 지도·평가에 할애할 의무와 함께, 이에 대한 인센티브(보상)도 주어진다. '지도전문의'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는 한국과 달리, 영국은 인건비를 비롯한 수련 비용으로만 매년 수조 원을 쏟아붓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공의들이 하루에 보는 환자 수도 최대 4명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많지 않다. 대신 "환자 1명을 끝까지 판다"는 게 문씨 설명이다. 전공의 근무시간이 최대 주 80시간인 한국과 달리 영국은 주 40시간이다. 이런 제도의 취지 역시 '환자 안전'에 방점이 있다.

그는 "전공의 시절 힘들어서 울고 있으면 교수가 바로 퇴근을 지시했고, 연차 휴가도 쓰지 않으면 되레 혼나는 분위기였다"며 "의사가 스트레스로 판단이 흐려지면 환자 진료에 영향이 갈 수 있고, 결국 환자 케어 질과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지난 5월부터 연속 근무시간을 최대 36시간에서 24~30시간으로 단축하는 시범사업을 실시 중이지만, 아직 갈 길은 먼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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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법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문승연씨를 지난달 29일 서울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전민규 기자

전공의에게 '리더십'을 강조하는 것도 차이점이다. 문씨가 수련한 정신과의 경우 전공의에게 지역사회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할 리더로서 책임감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는 "6개월 단위로 지역을 돌면서 수련하는데 첫 달은 교수 어깨너머로 배운다. 하지만 나머지 기간은 전공의가 간호사·작업치료사 등 6명의 의료진으로 이뤄진 팀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씨는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어떤 환자도 볼 수 있겠다'는 의사로서의 자신감과 자존감이 생겼다"면서 "전공의들이 그냥 누군가 밑에서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리더로서 길러지기에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교육은 못 받고 잡일에 시달린다"는 불만이 높은 국내 전공의 수련 체계와 대조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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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는 영국 전공의들. AP=연합뉴스

물론 영국 의료체계와 전공의 수련 방식이 완벽한 건 아니다. 일부 전공의들은 지난해 3월부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11차례에 걸쳐 벌였다. 현지에선 세금으로 무상의료 재원을 감당하는 NHS 시스템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또한 영국은 일반적으로 진료·수술 대기 시간이 길다고도 알려져 있다. 다만 한국의 빠른 진료도 전공의 노동력을 대거 투입한 측면이 있다.

문씨는 "영국 의사들이 연봉 인상 외에 다른 정부 정책을 두고 파업하는 건 아직 보지 못했다"면서 "여전히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영국 정부는 국민 정신건강에 예산을 약 1조원 투입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의사를 더 뽑되 임금도 늘리겠다고 했다. 의사들에게 이른바 당근과 채찍이 같이 가는 시스템이기에 신뢰가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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