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민주화의 상징이 '피 마시는 괴물' 됐다…시위대에 쫓겨난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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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5일(현지시간) 수천명의 시위대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총리 관저를 포위한 가운데, 관저 옥상 위로 한 대의 군용기가 지나갔다. 이 군용기에는 지난달부터 이어진 반정부 시위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려 300여 명을 숨지게 한 셰이크 하시나(76) 총리와 그의 여동생 레하나가 탑승하고 있었다. 한때 ‘민주주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이 나라 최장수 총리 하시나가 이렇게 조국을 떠나자 시민들은 “방글라데시를 파괴한 흡혈귀이자 괴물”이 떠났다며 환호했다.

이날 이코노미스트는 하시나의 사임과 도피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교활한 독재자 중 한명이자,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여성 수반이 분노한 시민에 의해 끌어내려졌다”고 전했다. 하시나는 40대인 1996년 이 나라 첫 여성총리가 됐다. 2001년 총선에 패해 정권을 내줬지만 2009년 재집권에 승리한 이후 이날 도피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다. 집권 기간은 모두 21년으로,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2005~21년)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1979~90년)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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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에서 연설 중인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민주화 기수’에서 독재자로 몰락

집권 초 그는 ‘민주화 기수’로 통했다. 그는 1947년 당시 동파키스탄 영토였던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벵골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1920~75년)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이다. 1975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라흐만 전 대통령을 포함한 가족 모두 군에 처형됐지만, 당시 해외여행 중이었던 하시나와 여동생은 참변을 피했다.

인도에 망명했던 하시나는 1981년 방글라데시로 돌아와 아버지를 이어 정치에 입문했다. 군부에 대항해 민주화를 위한 가두시위, 대중 봉기를 이끌며 여러 차례 투옥과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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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사임을 축하하는 동안 사람들이 초대 대통령의 동상을 훼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시나는 1996년 민주화의 열망을 등에 업고 총리가 됐다. 그는 인도와 물 공유 협정, 방글라데시 남동부의 부족 반군과 평화 협정을 체결해 역량을 인정 받았다. 동시에 인도에 대한 종속적 태도, 부정부패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집권 기간 방글라데시는 세계 의류 생산 기지로 떠올라 연 평균 7% 성장을 이어갔다. 지난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은 3배가 됐고, 지난 20년간 2500만 명 이상이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세계은행은 전했다.

BBC는 하시나에 대해 “‘강력한 여성 리더’ ‘빼어난 경제 성과’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군의 암묵적 지원을 받아 독재를 일삼았다”고 평했다. 이코노미스트도 하시나가 막강한 군사력을 통한 야당과 국민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는 방식에 의존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1월 총선은 불공정 선거를 주장하는 야당의 보이콧 속에 치러졌고, 하시나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경제도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등 크게 흔들려 민심이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1971년 독립전쟁 유공자의 자녀에 공직의 30%를 할당한다는 정책이 민심에 불을 당겼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수석 연구원인 치에티그 바지파이 박사는 “방글라데시는 매년 40만 명의 신규 대학 졸업생이 3000개의 공무원 일자리를 놓고 경쟁한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할당제는 반정부 시위의 화약고가 됐다”고 설명했다. 하시나가 시위대를 테러리스트라 부르며 군을 동원해 진압하면서 사망자 수가 300여명에 이르는 대참사가 벌어졌고, 시위는 하시나 퇴진을 요구하는 대중 봉기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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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습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위대 "노벨상 수상자 유누스가 임정 이끌어야"

시위대는 하시나가 떠난 관저로 돌진해 벽을 부수고 물건을 약탈했다. 시위대가 하시나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 라흐만의 동상에 올라가 도끼로 내리치자 거리의 시민들은 환호했다. 인도에 도착한 하시나는 여동생과 조카 툴립 시디크와 동행 중이며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한 상태다. 다만 영국 정부는 아직 망명 신청에 공식 답변을 내놓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모하마드 샤하부딘 대통령은 체포된 야당 지도자와 학생들을 석방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야당·군부와 긴급회의를 연 뒤 과도정부를 수립에 착수했다. 시위를 이끈 대학생 단체 대표들은 “파시스트 체제의 영원한 폐지”를 주장하며 “무함마드 유니스가 임시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인 유니스는 서민에 대한 무담보 대출로 빈곤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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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유누스 . 중앙포토

국제사회는 하시나 사임 후 폭력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매튜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지금까지 너무 많은 생명이 희생됐다. 침착함과 자제를 촉구한다”고 전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평화롭고 질서있는 민주적인 전환”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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