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밤마다 몸부림"…세계 최악 불면공화국, 80만명 치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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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가 19일째 이어진 7일 강원 강릉시 경포해변에서 열대야를 피해 나온 주민들이 잠을 자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직장인 최모(34)씨는 지난해 여름부터 잠을 잘 못 자 힘든 날을 보내고 있다. 어떤 날은 누워서 3시간 뜬 눈으로 보낸다. 과중한 업무와 예민한 성격 탓이라고 짐작하지만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 다음날 하루종일 피곤하고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 요새는 500원, 1000원 더 내고 '디카페인' 커피만 마신다. 그는 "카페인을 덜 섭취한다고 불면이 해소된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잠에 방해가 되는 건 줄이려 몸부림친다"고 말했다.

잠이 안 와서 병원을 찾는 환자가 80만명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경쟁, 극심한 스트레스 등이 '불면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올 여름엔 강력한 열대야가 찾아오면서 잠 못자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 세대·성별로 독특한 방식으로 불면을 이기려고 노력한다. 낮엔 디카페인 커피를 택하고, 밤엔 맨발 걷기를 하거나 휴대폰 수면용 영상을 켜놓고 잠을 청하는 식이다.

韓 수면시간 '꼴찌' 수준…어릴 때부터 만성화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 41분으로 세계 꼴찌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시간 22분, 2016년)보다 훨씬 짧다. 아동도 마찬가지다. 초록우산 조사 결과, 올해 아동·청소년이 하루 중 자는 시간은 평균 7시간 59분으로 3년 전보다 15분 줄었다. 불면을 겪는다는 비율도 8명 중 1명(13.1%)에 달했다. 경기연구원은 수면 문제로 인한 한국의 경제적 손실액이 연간 11조497억원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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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수면 부족이 만성화되니 병원을 찾는 발길도 늘고 있다. 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불면증 진료를 받은 환자는 78만2381명이다. 매년 꾸준히 증가하면서 2013년(44만8022명)의 1.7배가 됐다. 호흡장애 등 수면 관련 질환을 포함한 수면장애 환자는 109만8819명(2022년 기준)에 달한다.

요즘처럼 최저기온이 25도를 훌쩍 넘기는 열대야가 이어지면 더 괴롭다. 노성원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불면증 환자들은 열대야에 더운 날씨로 잠을 못 잔다고 말하는 경우가 확실히 많다"면서 "체온이 올라가면 수면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낮엔 '디카페인' 밤엔 '켜잠·맨발 걷기'…꿀잠 시도 다양

병원 밖에서도 불면과의 전쟁은 이어진다. 청년층은 잠에 빠지려고 익숙한 디지털 방식을 찾는다. 특히 휴대폰을 ASMR처럼 켜놓고 자는 이른바 '켜잠'이란 용어가 퍼진 지 오래다. 사람 숨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에서 익명의 상대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서 '켜잠' '보이스톡' '불면증' 등을 검색하면 관련 채팅방이 쏟아진다. 지난 3일 밤 10명 남짓한 채팅방에 들어가니 '다들 주무시나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목소리를 나눌 이를 찾는 보이스톡 신청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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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직장인들은 잠을 깨려, 일에 집중하려 커피를 달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불면이 걱정돼 '디카페인' 제품을 택하는 이가 빠르게 늘고 있다. 디카페인 커피는 대개 각성 효과가 있는 카페인 함량을 90% 이상 줄인 커피를 말한다.

관세청에 따르면 디카페인 생두·원두 수입량은 2018년 1724t에서 지난해 6521t으로 5년새 4배 가까이 증가했다. 2017년 디카페인 커피를 도입한 스타벅스는 올해 들어 누적 판매량이 1억잔을 넘겼다고 밝혔다. 커피 전문점들은 '잠 못 이루는 걱정 없이' 같은 디카페인 홍보 문구를 저마다 내세우고 있다. 직장인 서모(31)씨는 "오후엔 커피 '반샷'만 해도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서 "지난해부터 일부러 디카페인 커피만 마시고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층의 '맨발 걷기'도 불면사회가 투영돼 있다. 60대-50대-70대 순으로 수면장애 환자가 많은데, 이들 중 상당수는 숙면에 도움이 될까 싶어 맨발 걷기에 나섰다고 한다. 2년째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는 강모(68)씨는 "예전엔 잠자리에 들려면 수면유도제를 꼭 챙겨먹어야 했는데, 맨발 걷기를 시작한 이후론 밤에 잠이 잘 온다"고 말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각 지자체도 황톳길 같은 시설 확충에 나섰다. 자치법규정보시스템에서 '맨발'을 검색하면 100곳 넘는 시·군·구가 관련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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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경기 성남시의 황톳길에서 맨발 걷기 중인 시민들. 손성배 기자

숙면엔 '규칙적 습관' 중요…"잠잘 권리 보장돼야"

이러한 숙면 몸부림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마다 갈리는 편이다. 정기영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수면연구학회장)는 "디카페인 커피를 먹는 게 수면에 큰 도움이 되진 않지만, 일반 카페인 음료보다는 낫다"면서 "(디지털) ASMR도 관련 연구가 적긴 하지만, 청년층이 잠을 자는데 도움이 된다면 써도 괜찮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양광익 순천향대 천안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수면학회장)는 "ASMR 등이 수면을 유도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미약하다. 디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것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숙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규칙적 습관'이라고 입을 모은다. 양광익 교수는 "주중·주말 관계없이 일정한 기상 시간을 정해놓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잠자리 습관 교정을 넘어 근본적으로 잠잘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수진 초록우산 아동복지연구소 연구조사팀장은 "선진국에선 충분한 수면 시간 확보를 기본권으로 본다. 아동 불면 등을 막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면서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수면권을 다뤄야 한다. 성취·경쟁 위주에서 벗어나 수면·휴식이 권리라는 쪽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기영 교수는 "불면은 곧 만성질환 증가 등 사회적 비용으로 연결된다. 앞으론 '잠이 건강에 필수적'이란 원칙을 정해서 인식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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