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머스크도 주주 만나는데…한국 CEO 안 나온다, 소통점수 46점 [밸류업 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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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3일 열린 테슬라 2분기 실적 발표회.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는 이 자리에서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인 ‘엑스에이아이’(xAI) 투자 이슈를 언급하며 “xAI 투자에는 주주들의 승인이 필요하다. 주주 투표를 해서 (투자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머스크는 이어 한 시간 넘게 투자자들이 의구심을 보내는 ‘로보택시(자율주행 택시)’와 완전자율주행(FSD) 달성 계획 등을 설명했다. 이는 최근 한국에서 주요 기업들이 일반 주주들의 의사를 고려되지 않고 합병 등을 진행해 논란이 되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정부가 증시 부양을 위해 ‘기업 밸류업(가치제고)' 정책을 추진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국내 기업들의 ‘주주 소통’은 해외 주요 기업에 비해 여전히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주주·투자자와의 적극적이고 투명한 소통이 밸류업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기업들의 인식 변화와 이를 지원할 제도가 보완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머스크, 저커버그도 직접 소통

국내 상장사들의 미흡한 주주 소통 현주소를 가장 잘 드러내는 건 실적 발표 기간이다. 분기별 실적 발표는 주주 및 투자자와 소통하는 ‘기업설명회(IR)의 꽃’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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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가 지난 6월 13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2024년 테슬라 연례 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CNBC, 테슬라

이에 미국에서는 일론 머스크(테슬라)를 비롯해 팀 쿡(애플), 마크 저커버그(메타), 젠슨황(엔비디아) 등 시가총액이 수천조원에 달하는 기업의 CEO가 분기마다 등장해 실적을 발표하고 자체 전망치를 제시한다. 주주들이 민감한 질문을 해도 직접 답한다. 이번 2분기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의 실적 발표에서도 ‘도대체 AI수익화는 어떻게 할 건가’ 등 날카로운 질문이 오갔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경영지원실 임원이나 각 부문 부사장 등이 참석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올 2분기 주요 기업의 실적 발표 현장에서도 최고경영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삼성전자는 다니엘오 부사장, 김재준 부사장 등이 참석했고, SK하이닉스·LG에너지솔루션·삼성바이오로직스·현대차 등 시가총액 상위 5개 기업을 살펴봐도 최고재무책임자(CFO) 정도만 배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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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한 펀드매니저는 “한국의 CEO는 올림픽에는 가도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이나 IR에는 오지 않는다”며 “최고 의사결정자가 없으니 기업의 핵심적인 비전이나 계획에 대한 답도 나올 수 없고, 질문도 사전에 받아 답변하는 경우가 대다수라 실적 발표회에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8일 자산운용사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기업들이 최고경영자와 대주주 레벨에서 해외 투자자, 일반 투자자와 소통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기업들도 사정은 있다. 실적발표의 경우 ‘수치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실무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설명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국내 기업 IR관계자는 “어차피 애널리스트나 매니저들도 숫자 가지고 질문을 하기 때문에 답도 재무쪽이 하게 된다. 굳이 CEO가 나와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국내·외 사업 환경에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책임론’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도 기업들이 부담을 느끼는 대목이다. 익명을 원한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CEO가 한 말은 ‘빼박’(빼도 박도 못한다)이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책이 잡힐 수도 있고 M&A(인수합병)이나 구조조정 등 민감한 질문에 말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CEO 참석은 실무적인 효율을 떠나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며 “최근 싱가포르에서 외국계 펀드매니저와 면담을 했는데 ‘저커버그도 기관투자자들과 연 1회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국기업 CEO는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전했다.

대표기업 소통점수 46점

그렇다면 국내 기업들이 스스로 평가한 주주 소통 수준은 어떨까. 한국거래소는 올해부터 자본총액 5000억원 이상의 기업들은 매년 ‘기업지배구조보고서’를 공시하도록 했다. 이 보고서에는 5가지 ‘주주친화 경영 항목’이 있는데 이는 주주 소통과도 직결된다.

중앙일보가 올해 496개 코스피 상장사가 공시한 기업지배구조보고서를 전수조사한 결과, 주주친화 경영은 5개 중 3개 항목에서 준수율이 절반에 못 미쳤다. 기업들이 밝힌 항목별 준수율은 ▶예측 가능한 현금배당에 대한 정보제공(17.3%) ▶주총 4주 전 소집공고(29.0%) ▶연 1회 이상 배당계획 통지(41.1%) ▶집중일 이외의 날에 주총개회(66.9%) ▶전자투표(77.6%) 등이었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자기자본 5000억원이 넘는 기업들조차 평균 준수율은 46%에 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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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주주와 소통하는 내용의 질이나 투명성도 글로벌 기준에 못 미친다는 평가다. 단적으로 한국 기업 대다수는 기업설명회 등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반면 테슬라나 구글 등은 음성파일이나 속기록(스크립트)을 즉시 홈페이지에 공개해 모든 투자자가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두산밥캣의 경우 두산로보틱스와 합병을 발표한 뒤 지난달 12일과 15일 줌(화상회의 플랫폼)으로 설명회를 열었지만, 비밀번호를 걸어 한국인 소액주주는 제외했다. ([단독] 개미 분노 산 두산밥캣, 합병 발표 직후 외국기관만 설명회) 이에 대해 미국 펀드운용사 테톤캐피탈의 숀 브라운 이사는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에서는 IR을 실시간 스트리밍하고 회사 홈페이지에 즉시 개시하는 게 표준 관행”이라며 “한국 기업들은 IR 내용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보 비대칭성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아예 주주 소통을 하지 않는 곳도 부지기수다. 독립리서치 밸류파인더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2238개 전체 상장사 중 1973곳(88.2%)가 최근 5년 동안 IR을 전혀 개최하지 않았다. 주주관계 컨설팅 기업 IR큐더스의 이종승 대표는 “상장은 시장공개이고, 투자자와 소통하는 건 의무인데 한국 기업은 대주주 지분이 높은 구조적인 특징 때문에 회사의 주인이 주주라는 인식이 낮다”며 “주주 자본주의가 아닌 소유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당국이 밸류업에서 ‘소통’을 최우선으로 강조한다는 자체가 소통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라며 “일본도 밸류업 정책 이후 CEO들이 IR에 참석하는 등 변화가 있었던 만큼 우리 기업들도 바뀌어야 하고, 정부도 기업-주주간 소통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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