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밸류업 공시, 한국은 0.5% 일본 10%…기업들 눈치게임 중 [밸류업 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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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환 금융위원장(왼쪽)이 지난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기업 밸류업 상장기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내놓은 ‘기업 밸류업(가치제고)정책’이 시행된 지 반년이 지났다. 늘어나는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소액주주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기업들의 헐값 합병과 상장 폐지 등 밸류업에 역행하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밸류업 자율공시’를 한 기업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서 기업들이 여전히 눈치보기 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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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1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8일까지 상장사들의 자사주 매입은 2조500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약 25.1% 증가했다. 같은 기간 현금 배당은 39조8000억원 규모로 5% 소폭 증가했다. 특히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은 8조7100억원 규모로 전년 2조800억원보다 무려 318% 늘었다. 기업이 자사주를 소각하면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감수해 기존 주주들의 주식 가치가 커진다. 자사주 소각은 자본금을 줄여 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이는 효과도 있어 강력한 밸류업 방안으로 꼽힌다.

하지만 밸류업 정책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밸류업 공시’는 미진한 상황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기준으로 밸류업 자율공시를 한 곳은 키움증권·에프앤가이드·콜마홀딩스·메리츠금융지주·신한지주·우리금융지주 등 6개 뿐이다. 조만간 밸류업 공시를 하겠다는 예고공시를 한 기업도 KB금융·DB하이텍·HK이노엔·콜마비앤에이치·BNK금융지주·카카오뱅크·KT&G·컴투스 등 8곳에 그치고 있다. 2584(코스피 844개, 코스닥 1740개)개 기업 중 약 0.5%만 공시에 참여한 것이다. 일본에서 4개월 동안 약 10%가 넘는 기업이 밸류업 공시에 동참한 것과 비교하면 저조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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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한 운용사 매니저는 “밸류업 공시를 한 기업 중에는 목표 숫자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이행 방법 등은 밝히지 경우가 많고, 기존에 발표했던 내용을 재탕한 경우도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일부 변화가 감지된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박소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늘어난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은 확실히 기업들이 주주환원 분위기를 신경 쓰는 모습”이라며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주주환원 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최준철 VIP자산운용 대표는 “우리금융지주가 밸류업 공시에서 총 주주환원율을 40% 이내와 40% 초과로 나눠 시나리오별로 주주환원 계획을 세운 점이 인상적”이라며 “기업들이 단기가 아닌 중·장기적 주주환원책을 내고 있는 점도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롯데렌탈은 최근 실적발표에서 3년 간 당기순이익을 30% 배당에 쓰고 10%는 자사주 매입 및 소각에 쓰겠다고 밝혔다.

한 증권사 WM(자산관리)센터 관계자는 “최근 지방 중견 기업들 중에서도 밸류업 설명을 요청하는 곳이 많다”며 “상속이 끝난 기업들은 주가나 기업 평가를 끌어올릴 기회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기업들은 밸류업 공시를 하지 않을 경우 투자자들이 배당소득세 분리과세와 저율과세 등 세재개편안의 혜택을 받지 못하다는 점, 밸류업 지수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 투자자에게 외면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금융당국은 코스피와 코스닥을 포함해 최소 100개 이상 기업을 편입시켜 오는 9월 중으로 밸류업 지수를 발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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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지난 6월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상장기업 사내·사외이사 대상 기업 밸류업 설명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거래소

다만 높아진 시장의 눈높이와 정책 이행 압박에 부담을 호소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김춘 상장사협의회 본부장은 “기업들 입장에선 최소 3년이상의 중장기적인 발표를 해야 하는 만큼 준비 기간도 필요하고, 최근 경기나 기업 업황도 좋지 않아 부담이 큰 게 사실”이라며 “결국 지배주주의 결정이 중요한데, 아직까지는 주가나 기업가치를 올릴 큰 유인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변화에는 꾸준한 소통과 설득이 필요한 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정훈 삼성KPMG 밸류업지원센터장은 “주주환원은 결국 기업의 현금이 나가는 일이라 것이라 경영진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기업들이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동종기업으로부터 받는 압박)’를 느끼면서도 먼저 공시하거나 공시 이후 내용을 지키지 못해 부정적 평가를 받는 걸 두려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부터 밸류업 공시가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 밸류업 정책 관계자는 “100개가 넘는 기업에 설명을 다녔는데 내년도 사업 계획을 세우는 시점인 4분기에 하겠다는 곳들이 많았다”며 “코스피 200개 기업의 절반 이상이 올해 안에 (공시)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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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당국과 시장은 밸류업 정책을 둘러싼 여야 간 이견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밸류업의 실질적인 성패가 달린 세제혜택은 국회 합의 없이는 시행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밸류업이 성공하려면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 뿐 아니라 기획재정부(세재), 법무부(상법), 고용노동부(퇴직연금), 국민연금(스튜어드십코드) 등 관련 기관의 협력이 필요한데, 컨트롤타워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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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책현안 기자간담회를 열고 ″윤석열 정부의 밸류업 프로젝트 한계를 뛰어넘는 코리아 부스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오른쪽은 김남근 의원. 뉴스1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은 밸류업 이행을 위해 총리 직속으로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 협회의’를 만들고, 총리가 매달 참석하는 회의를 29번이나 열었다”며 “한국도 밸류업이 차질없이 진행돼 효과를 내려면 대통령실 직속의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여야가 함께 참여해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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