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소송해도 돼요?" 허락받는데 9년…증권소송 20년째 &a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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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국내 주식 투자 인구가 1500만명 규모로 커졌지만 이를 다루는 증권 관련 소송제도는 20년째 제자리걸음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투자 피해, 파두의 ‘공모가 부풀리기’ 논란 등 증권 분야에서 법적 갈등을 빚는 사례가 늘어나는 가운데, 실효성 있는 사후 제도 보완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부실 공시, 시세 조종 등으로 피해입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2005년 ‘증권관련집단소송법’을 시행했다. 피해자 대표가 손해배상을 청구해 승소하면 다른 피해자들도 배상받을 수 있는 일괄구제 제도로, 기업의 정도 경영과 투명성을 높이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전국 법원에 제기된 증권집단소송은 단 6건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 인구 차이를 고려해도 미국연방법원에 2021년에만 211건의 증권집단소송이 제기된 것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수치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5년 미국에선 투자자들은 폭스바겐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해 4800만 달러(약 650억원)를 배상받았다. 폭스바겐이 배출 가스량을 조작해 미국에 상장된 주식예탁증서(ADR)가 폭락했고, 이로 인해 투자자들이 손해를 입었다는 점이 일부 받아들여진 것이다.

‘소송 허락’에만 9년…범위 제한적  

반면 국내에선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2014년 ‘동양그룹 사태’ 피해자들이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지만 10년 만인 지난 2월 원고 패소로 확정됐다. 동양그룹은 2013년 부도 위험을 숨기고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발행해 투자자들에게 약 1조 3000억원의 손해를 입혔다. 재판부는 “증권신고서 등에 중요사항의 거짓 기재 또는 기재 누락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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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9월25일, 동양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터지자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양증권 영업장에 이른 시간부터 예탁금을 찾으려는 고객들이 몰린 모습. 뉴스1

증권집단소송이 드문 가장 큰 이유는 소송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집단소송은 사실상의 ‘6심제’로 운영된다. 해당 법에 따르면 원고 측은 본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법원에 소송 허가 결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기업 등이 즉시항고와 재항고할 수 있어 ‘소송해도 되느냐’에 대한 재판만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일례로 동양증권 투자자들이 두번째로 제기한 집단소송은 ‘제기하면 안 된다’는 결정을 받는 데 9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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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기자

배상 청구 대상도 좁다. 증권집단소송은 ▶주권상장법인이 발행한 증권의 거래에서 ▶증권신고서나 사업보고서 허위 기재, 시세 조종 등으로 인한 피해로 한정하고 있다. 펀드나 파생상품 부당 운용 등으로 인한 투자 피해는 원칙적으로 소송할 수 없다. 이에 21대 국회에서 집단소송 적용 범위를 넓히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된 상황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집단소송 제도의 진입 장벽이 과도하게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인 최승재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남소를 방지하고 ‘집단’이 제대로 형성된 것인지 보기 위해 6심제처럼 까다롭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한국과 달리 증권 분야 뿐 아니라 일반 민사 사건에서도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손해배상 청구 적용 범위도 별다른 제한이 없다. 일본도 증권을 포함한 모든 소비자 계약 분야에서 집단소송이 가능하다. 대신 일본은 정부가 인정한 소비자단체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승소하더라도 개별 피해자가 소송에 참여해야 배상받을 수 있다.

최승재 변호사는 “공동소송처럼, 집단소송을 하나의 소송 형태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과 같은)대륙법계인 프랑스, 일본처럼 위법한 행위가 있었는지, 배상책임을 얼마나 인정할 건지 여부만 판단하는 2단계 집단소송 제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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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전경. 연합뉴스

기업들은 집단소송 요건 등이 완화되면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모든 주주에게 배상을 하려면 천문학적인 액수가 드는데 기업 자체가 휘청일 수 있다”며 “증권 시장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권집단소송은 소송 제기 자체만으로 (기업)주가가 추락할 여지가 크다”며 “투자자를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 것인지도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주 돈 인식 바뀌어야 밸류업 성공” 

전문가 사이에선 최근 정부가 ‘기업 밸류업(가치제고)’ 정책으로 국내 증시를 부양하려 하는 만큼, 증권집단소송제도를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주주 소통에 나서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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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지난 6월 24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상장기업 사내·사외이사 대상 '기업 밸류업' 설명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거래소

현재는 공시 의무 등에 있어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투자자가 손실을 봐도 배상 책임이 인정되기 어렵다 보니, 주주에게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할 유인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주주 소통을 강화하게 만들기 위해선 금융 당국의 사전 규제뿐 아니라 주주 소송이라는 양 날개가 작동해야 한다. 금융 시스템엔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사전 규제에 비해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묻는 소송은 활발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부분 국내 기업은 주식 상장으로 얻은 주주자본비용은 ‘제로(0)’라고 생각하는데, 일본이 그랬듯 한국도 밸류업을 위해선 주주자본비용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며 “상장 기업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결국 주주 소통, 밸류업도 이룰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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