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체조 전설'도 겪은 마음의 병…韓선수단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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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 시급한 엘리트 선수 마음돌봄

2024 파리올림픽에서 144명의 소수 정예 대한민국 선수단은 최고 성적(금 13·은 9·동메달 10)을 기록했습니다. 고된 훈련과 정신적 압박을 견디고 한계를 뛰어넘은 선수들의 도전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습니다. 그런데 성공의 이면에 가려진 선수 한 명 한 명의 마음은 온전할까요? 운동선수의 정신력은 과대평가되는 반면에 마음앓이는 과소평가되기 일쑤입니다. 중앙일보는 지난달부터 올림픽 주요 종목과 전·현직 선수·지도자·주치의를 만나 선수 마음건강 문제를 취재했습니다. 엘리트 선수의 완벽한 몸, 그 안에 깃든 불안을 들여다봤습니다.

2024 프랑스 파리올림픽에서 사상 최고 성적을 일군 국가대표 선수들의 영광 속에는 피·땀·눈물 그리고 ‘불안’이 녹아 있었다.

대한체육회가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4 파리올림픽 기간(7월 26일~8월 12일) 대한민국 선수단이 받은 심리상담·검사는 총 20건으로 집계됐다. 전체 선수단(144명) 중 13.8%가 심리상담을 받은 셈이다. 순간의 실수, 0.01초 차이로 결과가 좌우되는 경기를 앞두고 극심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은 선수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파리올림픽 선수단의 원격 심리지원을 맡은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선입견이 여전한 현실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선수가 도움을 청했다”며 “어려움을 갖고 있어도 자각하지 못하거나 숨기는 선수도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사례도 상당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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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엘리트 선수 정신건강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덕현 교수는 이번 파리올림픽 선수단의 원격 심리지원을 맡았다. 김종호 기자

선수들 “경기 전 불안·부담, 선수·코치 관계 스트레스 호소”

이번 올림픽 전후 선수들이 호소한 심리 문제는 주로 ①경기 전 불안·부담감 호소 ②선수·선수 또는 선수·지도자 간 관계 스트레스 등으로 파악됐다. 한덕현 교수는 “메달리스트를 포함하여 병적 불안을 겪는 선수가 적지 않았다”며 “가슴이 둥둥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근육이 내 근육 같지 않다’는 느낌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불안 등 상태를 자각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안정을 되찾고 상태가 호전됐다”며 “선수가 자발적으로 상담을 요청하는 빈도도 늘었다”고 덧붙였다.

선수의 마음을 돌봐야 한다는 논의는 국제스포츠계에서 이제 낯설지 않다. 지난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체조 전설’ 시몬 바일스(27·미국)의 기권 사태가 도화선을 당겼다. 당시 바일스는 공중 동작 때 불안으로 방향감을 잃는 ‘트위스티스(twisties)’ 증상을 호소하며 개인종합 결선 출전을 포기했다. 올림픽 선수의 정신건강 문제가 공론화된 계기가 됐다.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때부터 정신건강 관련 자격을 보유한 복지책임자(Welfare Officer)를 참가국 대표단에 포함하라는 방침을 정했다.

대한체육회도 이번 올림픽에서 복지책임자(구슬이 심리상담사)를 파리에 파견했다. 올림픽을 100일 앞둔 지난 5월부터는 스포츠 정신의학의 권위자인 한덕현 교수를 초빙해 심리지원을 했다. 한 교수는 사격·수영·펜싱 남녀 사브르 등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 50여명을 대상으로 훈련과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심리 코칭을 5주간 진행했다. 선수의 불안·우울감 등 심리적 어려움을 미리 진단하고 선수와 지도자 간 성격 차이로 겪는 오해를 풀어보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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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베르시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체조 여자 도마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 시몬 바일스가 환하게 웃고 있다. 바일스는 2021 도쿄올림픽에서 극도의 불안과 긴장감을 소호하며 중도 기권하면서 엘리트 선수 정신건강 문제에 불을 지폈다. 연합뉴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선수 정신건강 인식과 지원체계는 갈 길이 멀다”고 지적한다. 취재진이 만난 수십 명의 전·현직 엘리트 선수와 지도자들은 “정신건강 문제를 밝히면 ‘멘탈에 문제가 있다’고 낙인을 찍거나 불이익을 주는 현실은 그대로”라고 말했다.

좁은 인력풀도 고민거리다. 국가대표를 지원하기에 적합한 능력과 경력을 갖춘 스포츠 심리 전문가는 태부족이다. 한덕현 교수가 파리올림픽 기간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화상 앱 줌(zoom)으로 원격 상담을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미국과 일본이 파리에 스포츠 심리 전문가를 각각 14명, 4명 파견한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은 바일스의 기권 사태 이후 ‘정신건강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체계적 대응에 나섰다. 비(非)올림픽 기간에 심리 상담 전문가 15명을 배치해 꾸준히 지원했다. 지난해에만 1200명이 넘는 미국 대표선수가 5500회 이상 심리치료와 상담을 받았다. 일본은 온라인상 혐오 발언과 괴롭힘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전문가까지 파리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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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황제 ` 마이클 펠프스가 지난 2008년 8월 베이징 아쿠아큐뷰 수영장에서 벌어진 수영 남자 혼계영 400m에 3번째 선수로 접영을 하며 질주하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 23개를 목에 건 펠프스는 이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중앙포토

마이클 펠프스 “우울증 밝혔을 때 금메달보다 큰 힘”

올림픽 스타가 앞장서 ‘멘탈 낙인’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올림픽 최다 금메달(23개) 보유자인 마이클 펠프스(39·미국)는 선수 시절 “올림픽 때마다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현재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선수를 지원하고 있다. 펠프스는 “우울증 공개를 통해 올림픽 금메달 획득 때보다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에드손 필호(Edson Filho) 보스톤대 교수(스포츠·운동수행 심리학과)는 중앙일보와 e메일 인터뷰에서 “정확한 전환점을 찾긴 어렵지만, 미국에선 엘리트 선수의 정신적 어려움에 관한 공개적 지지와 증거 기반의 스포츠심리학 연구의 발전이 낙인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강유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운동선수의 육체적 건강만큼 마음 건강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아직 부족하다”며 “올림픽 이후로도 선수들이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신건강을 돌볼 수 있는 인식 개선과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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