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공황장애 딛고 8관왕 박지수 “그냥 밝혔어요, 죄지은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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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경기 용인시의 한 호텔에서 농수선수 박지수(26)가 왼쪽 손목에 새긴 문신을 보여주고 있다. 2021년 도쿄올림픽 출전을 계기로 새긴 문신이다. 그는 지난 2022년 7월 발병한 공황장애로 5개월 동안 코트를 떠났다. 이영근 기자

‘농구 여제’ 박지수(26)가 내민 왼손목에는 오륜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2021년 도쿄올림픽 출전 당시 새긴 문신이다. 국가대표로 뛰는 것은 언제나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던 그가 잠시 태극마크를 뗀 적이 있다. 지난 2022년 9월 열린 호주 여자농구 월드컵 때다. 그해 7월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은 박지수는 코트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5개월 만에 공황장애를 극복하고 화려하게 복귀했다. 2023~2024 여자프로농구(WKBL) 사상 최초로 8관왕에 올랐고, 기자단 만장일치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그는 오는 20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2026 국제농구연맹(FIBA) 여자농구 월드컵’ 사전 예선 준비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프랑스 파리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달 31일 경기 용인의 한 호텔에서 마주 앉은 박지수는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은 꼭 출전하고 싶다”며 웃었다. 현역선수로선 이례적으로 정신건강 문제를 주변에 공개했던 박지수에게 공황장애 극복기를 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

당시 증상이 얼마나 심했나.
2022년 7월 강원도 태백선수촌에서 훈련할 때였어요. 온몸이 마비되듯 얼어붙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응급실에 실려 갔죠. 병이라는 생각을 못 했는데 공황장애라고 하더라고요. 증상이 점점 심해졌어요. 처음에는 식당에 못 들어가더니 나중엔 집 밖에만 나가도 숨이 안 쉬어지고 바로 쓰러지더라고요.
원인이 무엇이었나.
결정적 사건은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야금야금 쌓인 스트레스가 확 터진 것 같아요. 아버지가 농구선수(박상관)였기 때문에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딜 가든 인사도 열심히 하고 노력했는데 그게 다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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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서울 영등포구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xxxx-xxxx 여자프로농구 시상식에서 정규리그 MVP에 선정된 KB스타즈 박지수가 수상 소감을 말하던 중 눈물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현역선수가 공황장애 진단 사실을 밝히는 건 이례적인 일인데.
처음엔 이겨내고 싶은 의지가 강해서 주치의한테 “약 먹고 뛰면 안 되냐”고 했어요. 극구 반대하더라고요. 또 이유를 안 밝히고 대표팀 소집을 거부하면 여러 소문이 돌 게 뻔했어요. 사람들 시선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그냥 밝혔어요. 스트레스를 더 받으면 제가 못살 것 같더라고요. 죄지은 것도 아니잖아요.
휴식 기간에 특별히 노력한 것은.
농구 생각을 안 하려고 했어요. 제 인생은 농구가 전부였어요. 취미도 없고 집에만 있었어요. 휴일에는 집에서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어요. 진단 초기에도 빨리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죠. 그런데 주치의와 멘털 코치가 제 마음을 알아차리고 “낫는 게 먼저니까 농구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신기하게 농구를 놓은 순간부터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말처럼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웠죠. 근데 제가 일생 생활도 못 할 정도가 되니까 그냥 싫어지기까지 하더라고요. 항상 저 스스로보다 농구가 먼저였고 시합이 먼저였는데, 극한 상황까지 가니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농구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정신건강 문제 너무 ‘딥(deep)’하게 안 봤으면”

복귀 계기가 있었나.
전환점이 있었어요. 집에만 있으면 안 된다길래 하루는 어머니 지인의 아들이 뛰는 고교 배구경기를 보러 갔어요. 농구장은 도무지 갈 용기가 안 났고요. 처음엔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렇게 몇 달 동안 배구장을 드나들었는데, 전국체전에서 그 친구가 득점하고서 세리머니를 했어요. 그 순간 갑자기 농구가 그리워지더라고요. 빨리 팬들 앞에서 세리머니도 하고 싶고, 환호도 듣고 싶고. 저 자신도 의아한 감정이었어요.
막상 복귀가 쉽진 않았을 것 같다.
매일 누워지내서 근육도 다 빠지고 살도 10㎏ 정도 빠진 상태였어요. 걷기만 해도 숨이 찬데 공은 만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킬 트레이너 친구 도움을 받아 아무도 없는 코트에서 골밑슛부터 편하게 연습했어요. 본격적인 연습이라기보단 그냥 놀면서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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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경기도 부천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은행 우리WON 2023~2024 여자프로농구 플레이오프 3차전 부천 하나원큐와 청주 KB스타즈 경기에서 박지수가 드리블을 하고 있다. 지난 2022년 공황장애로 시즌 아웃된 박지수는 이번 시즌 여자프로농구 최초로 8관왕에 등극하며 부활했다. 연합뉴스

그렇게 복귀한 박지수는 2022년 12월 17일 하나원큐와의 경기에서 3쿼터 초반 투입됐다. 약 8분간 뛴 그가 남긴 기록은 2득점 2블록 2리바운드. 경기를 마친 뒤 박지수는 “한 골 넣기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히며 눈시울을 붉혔다.

공황장애로 얻은 것이 있다면.
저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치료하면서 산책을 많이 했어요. 걷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더라고요. 삶을 다시 살게 된 것 같고 크게 성장한 시간이었어요.
아직 약을 복용 중인가.
양을 줄이긴 했지만 지금도 복용 중이에요. 경기 중에 증상이 올라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욕심 내지 않아요. 오기 부리면 하루 쉬면 될 것도 일주일 넘게 녹다운이 된다는 걸 알았어요. 공황장애와 공존하는 법을 배운 거죠.
스포츠계에서 ‘멘털 낙인’은 어떤가.
여전히 주변 시선이 두려워서 밝히길 꺼리죠. 입지가 탄탄하지 않은 선수는 더 밝히기 부담스럽죠. 마음의 병도 다른 부상처럼 치료받으면 다시 호전될 수 있잖아요. 사회든, 스포츠계에서든 정신적 문제를 너무 ‘딥(deep)’하게 안 봤으면 좋겠어요.

불안증 딛고 7년 만에 MLB 복귀한 투수 다니엘 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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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투수 다니엘 바드(39)는 입스(Yips)로 지난 2017년 은퇴 후 3년만에 마운드에 복귀했다. 입스는 선수가 평소 망설임 없이 하던 동작이 정신적인 이유 등으로 평소처럼 되지 않는 현상이다. 사진은 지난해 9월 바드가 LA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투구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최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선 선수 정신건강 관리 체계·문화에 극적인 변화가 일었다. 입스(Yips)로 은퇴했다가 마운드에 복귀한 투수 다니엘 바드(Daniel Bard·39)의 사례가 변곡점이었다. 입스는 선수가 평소 문제없이 하던 동작을 정신적인 이유 등으로 갑자기 수행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바드는 보스톤 레드삭스에서 드래프트 1라운드에 지명될 정도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200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바드는 2010년 1승 2패 32홀드 평균 자책점 1.93을 기록하며 이름을 알렸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2012년 입스가 찾아왔다. 시속 160㎞에 육박하는 강속구는 온데간데없고 관중석과 타자의 몸을 향해 공을 던지기 일쑤였다. 2013년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그는 다른 팀을 전전했다. 5부리그 격인 루키리그로까지 추락한 그는 2017년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바드의 여정은 끝난 듯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멘토링 코치로 부임한 그는 어느 순간 제구 실력이 회복됐다고 느꼈다. 2020년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뒤 마운드에 복귀했다. 2020년 7월 26일, 언제 입스가 있었냐는 듯 맹활약한 바드는 빅리그 승리를 이뤄냈다. MLB 통산 11승째이자 2979일 만에 거둔 감격의 승리였다. 그해 바드는 ‘올해의 재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 입스가 재발했다. 그는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베네수엘라와의 8강전에서 심각한 제구력 난조를 보이며 상대 선수를 다치게 했다. 바드는 2023 시즌 개막 직전 부상자 명단에 등록됐다. 병명은 “불안(Anxiety)”. 이후 바드를 격려하는 선수와 팬의 응원이 쇄도했다. 바드처럼 불안 증세로 부상자 명단에 등록하는 선수도 나왔다. 바드는 “27살 때와 달리 이제 불안을 나의 일부로 본다”고 말했다.

이후 정신건강을 바라보는 MLB 문화가 변했다. 메이저리그 각 구단은 ‘정신건강의 달’로 지정된 매년 5월마다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연다. 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선수를 부상자 명단에 등록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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