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야, 공 똑바로 안 던져?"…이 한마디에, 내게 '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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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기권해 운동선수 정신건강 문제 공론화에 불을 지폈던 ‘체조 전설’ 시몬 바일스(27·미국)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3관왕에 올랐다. 바일스는 파리올림픽 단체전 전날 밤 심리 치료를 받았다. 그는 경기장에서 명상하는 자신의 사진을 지난 2일 인스타그램에 게재하며 “정신건강은 중요하다”는 글을 썼다.

스포츠 엘리트 선수의 정신건강 문제는 전 세계적인 화두다. 파리올림픽을 앞둔 지난달 25일 뉴욕타임스(NYT)도 “모든 스포츠 분야에서 선수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에 대한 낙인을 지우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국내 엘리트 선수 중에도 심리적 요인으로 좌절을 경험한 사례가 적지 않다. 두산베어스 외야수 출신 김준호(33) 기장 베이스볼클럽 감독도 그런 경우다. 2007년 야구 명문 경남고에 입학한 김 감독은 내야수와 투수를 겸하는 유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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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두산베어스 외야수 출신 김준호 기장베이스볼클럽 감독이 텅 빈 웅상체육공원 야구장을 바라보고 있다. 2010년 프로구단에 입단한 김 감독은 선수 시절 근거리 투구에 어려움을 겪는 입스(yips)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했다. 송봉근 기자

“그따위로 던져” 한 마디에 찾아온 괴물

그해 1월 첫 동계훈련의 어느 날을 김 감독은 잊지 못한다. 한 선배에게 배팅볼을 실수로 잘못 던졌다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이 XX야, 공 똑바로 안 던져?” 바로 다음 날부터 김 감독의 어깨는 평소와 달랐다. 수만 번은 연습했을 1루 송구가 안 돼 공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입스(Yips), 운동선수 사이에서 괴물로 불리는 현상이었다. 스포츠 정신건강 전문가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입스는 과도한 불안과 긴장감 등으로 가장 편하게 하던 행동도 하지 못하는 부조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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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베어스 외야수 출신 김준호 전 선수가 지난달 23일 경남 양산시 웅산체육공원야구장에서 본지 기자와 캐치볼을 하고 있다. 그는 선수 시절 마음의 병인 입스로 근거리 송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날 기자와의 캐치볼에서는 정상적인 자세로 정확하게 송구했다. 송봉근 기자

그날부터 입스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코치의 조언에 따라 근거리 송구를 할 일이 별로 없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다행히 타격 성적은 좋았다. 2008년 타율 4할 9리를 기록하고 부산광역시야구협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201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5라운드 39순위로 두산베어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낙인은 여전했다. 다른 선수에 비해 크게 실수하지 않아도 “쟤는 쪼당(입스의 은어 표현) 걸린 X”라는 말이 들렸다. 수비가 안 되는 반쪽짜리 선수란 말에 더 위축됐다. 악순환에 빠졌다. 타격 연습할 시간에 송구 자세를 100번도 넘게 바꿨다. 그는 “공을 던질 때마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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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입스로 어려움을 겪은 김준호 기장베이스볼클럽 감독은 가르치는 학생을 이유 없이 심하게 나무라지 않는다. 그는 "유소년 때는 아직 단단한 마음이 형성되기 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쪼당’ 걸린 반쪽짜리 선수 낙인 

당시엔 심리·정신적 어려움으로 병원을 가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전문심리 코치도 없었다. 김 감독은 “비정기적으로 오는 심리상담사에게 상태를 이야기하기만 해도 상태가 나아졌다. 처음부터 병원을 찾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했다. 결국 그는 입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14년 은퇴했다. 그러자 입스가 사라졌다. 김 감독은 “운동선수한테 부상은 익숙하고 대처법도 명확한 일이지만, 마음의 병이 오면 대부분 어떻게 대처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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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기아타이거즈 포수 출신 이홍구(34) 선수. 그는 "프로는 육체적으로 다 만들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심리가 매우 중요하다. 불안을 떨쳐낼 수 있게 돕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IOC “운동선수 정신건강 일반인보다 취약”

김용일 LG트윈스 수석트레이닝코치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입스로 은퇴한 선수가 수없이 많다”고 했다. 202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기아 타이거즈 포수 출신 이홍구(34) 선수도 입스를 겪었다. 압박감 탓에 투수의 상체를 향해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는 “정신건강 관리 체계가 나아졌다고는 해도 약점을 밝히기가 어려운 분위기다. 유소년 야구는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현역 선수의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전 세계 심리학자 등 20명으로 구성된 ‘IOC 정신건강 워킹그룹 분석(2019)’에 따르면 현역 선수의 33.6%, 전직 선수의 26.4%가 불안과 우울 증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인 중 약 13%가 정신건강 관련 증세를 보인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높은 셈이다.

두 번의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프로골퍼 서형석(27)도 입스를 겪었다. 지난 2022년 그는 불안감 때문에 제대로 스윙하지 못했다. 그는 “‘공이 이상한 곳으로 가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이 무의식중에 깔려있으니 샷이 잘 안 맞았다”며 “일종의 트라우마 같다”고 말했다.

부상 트라우마도 흔하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여자 다이빙 ‘3m 싱크로나이즈드’ 결승에서 은메달을 딴 강민경(39) 선수도 그런 경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10m 플랫폼’ 고난도 동작 훈련을 하다가 실수로 등으로 입수했다. 이후 두려움으로 같은 동작을 하다가 허리가 꺾이는 부상도 입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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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기자

전문가들은 스포츠 선수의 심리·정신적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프로야구 구단들은 멘털 전담 코치를 두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10개 구단을 조사한 결과, 3개 구단(KT·NC·두산)은 멘털전담 코치를 두고 있었고, 전문가와 연계해주는 구단(LG·삼성·키움·SSG·기아)도 5곳이었다. 김용일 LG트윈스 코치는 “전문가 섭외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며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상담해도 괜찮다는 문화를 조성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유소년 단계에서부터 지도자들이 마음건강 문제에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앙일보는 지난달 27일 잠실야구장에서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김용일 LG트윈스 수석트레이닝 코치를 만나 인터뷰했다. LG트윈스 스포츠 심리 닥터를 맡은 한 교수는, 선수 심리지원 필요성을 느낀 김용일 코치와 2004년 연을 맺었다.

선수들이 정신 어려움을 겪는 일이 흔한가.
(김용일 LG트윈스 수석트레이닝 코치, 이하 김) 많은 선수가 스트레스로 수면장애 등을 겪어 경기력 저하를 경험한다. 선발 투수는 길게는 3시간 공을 던져야 하는데 피로감이 배가 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2만5000명(잠실야구장 수용인원)이 날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부담이 상당하다.
의사 등 전문가 접근성 강화가 필요한 이유.
(김) 전문가가 아니면 불만만 들어줄 수 있을 뿐 원인이 뭔지, 어떻게 상담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전문가가 있어야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가능하다. 또 선수의 기량 향상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심리적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더 좋은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만큼 스포츠가 그만큼 ‘디테일’하게 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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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LG트윈스 김용일 수석 트레이닝 코치가 지난달 27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요즘 선수들은 정신 문제로 상담받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
(김) 과거엔 선수들에게 정신의학 전문가와 상담해 보라고 하면 “제가 미친X이냐”며 거부했다. 구단에서 상담 내용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철저히 비밀 유지를 하면서 선수들과 신뢰를 쌓았다. 이젠 자연스럽게 상담을 한다.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하 한) 과거보다 상담 빈도가 늘었다. 경기 끝나고 나서 전화도 자주 온다. 필요하면 팀 주치의를 찾는 게 거의 공식화했다.
사회적 낙인에 대해 선수들의 생각은 어떤가.
(김) 처음엔 가능하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상담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 없이 트레이너실이나 훈련장에서 상담을 나눈다.
(한) 정신 상담을 받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선수와 사람들 시선을 피해 차 안에서 족발을 먹으며 상담한 적도 있다. (정신 문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사라져야 선수가 더 건강해질 수 있다.
2024 파리올림픽 이후 선수 정신건강 관리는
(한) 올림픽 뒤 선수들이 겪을 수 있는 ‘포스트 올림픽 블루(Post-Olympic Blues)’ 관련 지원이 필요하다. 대회에서 목표를 이룬 선수는 다음 목표를 고민하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선수는 앞으로 방향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올림픽은 끝이 났지만, 선수 마음 돌봄은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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