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에·루·샤'도 백화점 1층서 방 뺀다…그 자리 차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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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이 바꾼 백화점, 스몰 럭셔리가 뜬다

지난 20여 년간 어딜 가나 백화점 1층에선 고가의 이른바 명품 브랜드를 만날 수 있었다. 1층에 어떤 브랜드가 입점하느냐가 그 백화점의 수준을 말해주던 시기였다. 하지만 경기 침체, 주 수요층과 소비 패턴 변화 등으로 이제는 백화점 1층에서 에르메스·까르띠에 같은 명품 브랜드 만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대신 이들 브랜드가 있던 자리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거나, 뷰티·커피 등 이른바 ‘스몰 럭셔리’ 취향의 매장이 하나둘 입점하고 있다.

경기 불황에 스몰 럭셔리가 주요 소비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지금껏 명품 매출 위주로 먹고살던 백화점도 20여 년 만에 변신 중이다. 한국이 선진국 수준의 경제 궤도에 처음 진입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부터 백화점은 주요 지점별로 1층에 명품 브랜드를 대거 배치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1층에 명품 대신 스몰 럭셔리(Small Luxury·화장품·식료품 등으로 하는 작은 사치) 브랜드를 전진 배치, 소비자를 끌어모으면서 당초 생각보다 길어진 불경기를 기회로 바꾸고 있다.

스몰 럭셔리, 적은 금액으로 누리는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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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강남점 1층에 여는 프라다뷰티 매장. [연합뉴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백화점 명품 매출 증가율은 최근 하락세가 뚜렷하다. 올해 1분기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의 명품 매출 증가율은 각각 10%, 14%, 12%였다. 그런데 2분기 들어 각각 5%, 8%, 11%로 떨어졌다(이상 전년 동기 대비). 소비자가 불경기 여파 등으로 명품 소비를 줄이고 있다는 얘기다. 명품 구매를 위해 새벽에서 줄서서 기다리는 ‘오픈런’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2분기 백화점 3사의 실적은 우려보다 양호했다.

현대백화점은 2분기 총매출이 2조4773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고, 신세계는 1조7462억원으로 2분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롯데도 2조1035억원으로 선방했다. 업계 관계자는 “명품 매출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영패션과 스몰 럭셔리 등의 매출 호조에 힘입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 기간 3사 주요 지점의 화장품 등 스몰 럭셔리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30%대 고성장을 기록했다. 잡화 가운데 대표적인 스몰 럭셔리 품목으로 꼽히는 선글라스의 경우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최소 27%(신세계)에서 최대 40%(롯데)나 증가했다. 패션 선글라스 외에도 러닝과 골프 등 MZ세대가 야외 활동에서 착용할 수 있는 오클리 등의 스포츠 고글 수요가 급증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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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현대 서울 1층엔 스몰 럭셔리를 위한 팝업스토어가 수시로 마련 된다. 최영재 기자

백화점이 소비 트렌드 변화의 기미를 빠르게 포착, 지점별 얼굴이자 요충지인 1층을 스몰 럭셔리로 가득 채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은 강남점을 2021년 7월 리뉴얼하면서 1층에 국내 최대 규모의 럭셔리 화장품 전문관을 마련한 이후로 매년 이곳 스몰 럭셔리 소비층 공략을 강화 중이다. 올해 6월엔 스페인의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인 로에베가 만든 향수, 로에베퍼퓸의 단독매장을 이곳에 열어 MZ세대 발걸음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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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강남점은 과거였다면 1층을 차지 했을 글로벌 3대 명품 브랜드(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이른바 ‘에루샤’와 4대 주얼리 브랜드(까르띠에·반클리프아펠·티파니앤코·불가리)를 모두 2층에 배치하는 파격 승부수를 뒀다. 일각의 우려도 있었지만, 이는 지난해 단일 유통 점포 중 사상 최초 3조원대 연매출(3조678억원) 기록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미 명성이 드높은 명품 브랜드는 2층으로 가더라도 소비자가 항상 몰린다. 이에 비해 명성이나 가격대가 낮지만, 그만큼 기대되는 신규 유입 효과도 큰 럭셔리 화장품은 1층에 배치했을 때 한층 효과적일 수 있다는 계산과 전략이 통한 것이다.

명품은 1층 아니어도 소비자 항상 몰려
백화점 3사 중에 올 2분기 가장 많은 매출을 달성한 현대백화점은 이보다 더 파격적인 전략이 주효했다. 여의도에 있는 더현대 서울은 2021년 2월 ‘에루샤’가 아예 입점하지 않은 서울 최대 규모 백화점으로 문을 열어 우려를 낳았다. 그럼에도 지난해에 역대 최단기간(개점 2년 9개월여 만) 연매출 1조원을 달성한 인기 백화점으로 자리 잡았다. 1층을 명품 브랜드로 가득 채우는 대신에 전시 등의 문화 공간, 네스프레소 등 리빙 매장으로 꾸미면서 스몰 럭셔리 취향의 소비자를 겨냥한 게 통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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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유정 기자 xxxxxxxxxxxxxxxxxxxxxxxxxxx

또 다양한 팝업스토어와 함께 식료품 매장 역시 유명 외식 브랜드와 프리미엄 식품 라인업으로 꾸려 MZ세대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핫플(핫플레이스)’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식품관 매장 3분의 1 이상을 베이커리와 디저트 등 MZ세대의 스몰 럭셔리 취향으로 구성한 것도 그래서다. 정지영 현대백화점 대표는 “더현대 서울은 단순 쇼핑 공간에 머물던 백화점에 대한 인식을 깨고 오프라인의 재발견과 공간 경험 가치 극대화 같은 새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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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유정 기자 xxxxxxxxxxxxxxxxxxxxxxxxxxx

롯데백화점은 1층에 국내 최대 규모 뷰티관을 조성한 본점 외에도 잠실의 롯데월드몰에서 지난해 3월 노티드월드, 8월 런던베이글뮤지엄 등 스몰 럭셔리 맛집이 입점해 마찬가지로 MZ세대 호응을 얻고 있다. 월평균 15만 명 이상이 찾는 런던베이글뮤지엄은 지난해 예약 애플리케이션 캐치테이블에서 웨이팅이 가장 많은 맛집에 이름을 올렸고, 노티드월드도 3위를 차지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런던베이글뮤지엄이 1층에 입점한 이후 1층 전체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0%가량 늘어나는 등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전했다.

이에 신세계 강남점도 올해 2월 국내 최대 규모의 디저트 전문관인 ‘스위트파크’를 열면서 스몰 럭셔리 맛집 강화에 힘쓰는 데 나섰다. 고급 디저트를 사먹기 위해 백화점에 가는 MZ세대를 또 한 번 정조준한 것이다. 이는 해외 유명 디저트 브랜드가 밀집한 명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개관 한 달 만에 누적 방문객 140만 명을 기록하는 등 호응을 얻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스위트파크가 신세계 강남점 매출을 30% 넘게 끌어올리면서 전체 실적을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스몰 럭셔리의 인기가 당분간 이어지면서 백화점의 해당 수요 공략도 한층 가속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주변에 일상을 공유하는 것을 취미 삼는 MZ세대는 소비를 통해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본인의 예산 허용 범위 안에서 접근 가능한 스몰 럭셔리에 상대적으로 집중, 주변에 과시하려는 소비 심리가 트렌드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스몰 럭셔리에 소비하는 금액도 계속 모이면 커지는 만큼, 계획 대비 너무 무리한 지출은 지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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