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바람 피우다 벽장에 갇힌 남편…'K드라마 대모'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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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소설이 뭐 어때서? 저 순수귀신들 확 마! 순수귀신을 몰아내라! 살아있는 문학이 아닌 죽은 문학을 추구하니 순수귀신이지."

1930년대를 주름잡은 K-드라마의 대모, 김말봉이 무대에 올라 소리친다. 그는 순문학 위주의 문단을 비판하며 “독자가 이해하든 말든 자기가 쓰고 싶은 글만 쓰면 된다고 기염을 토하는 작가”를 “순수귀신”이라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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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의 한 장면. 김말봉 역의 배우 이한희가 독백하고 있다. 사진 서울연극협회·양동민

음악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연출 정안나)는 통속소설의 대가, 김말봉의 생애를 조명한다. 1901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말봉은 일본 유학파 출신에 당시로써는 드문 커리어 우먼이었다. 교사를 거쳐 기자가 됐고 여러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다. 대중적 인기를 모았지만 오랫동안 잊혔다. ‘통속적’이라 평가받으며 문단에서 외면받았기 때문이다.

연극은 김말봉의 소설 세 편을 무대 위로 소환한다. '고행'은 아내에게 불륜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벽장 속에 숨은 한 남편의 이야기. 아내와 형님 동생 사이로 지내는 한 이웃 여성과 바람이 난 남편은 내연녀의 집에서 시시덕거리던 중 갑작스러운 아내의 방문에 놀라 벽장으로 숨는다. 벽장 속에서 벼룩에 물린 남편은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다 벽장을 치고, 내연녀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진땀을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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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은행장 조만호의 집에 가정교사로 취직한 정순(왼쪽)과 조만호의 딸 경애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사진 서울연극협회·양동민

남편이 벽장으로 숨자 무대 위 스크린에 초조해하는 남편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비친다. 간지러움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는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아내가 내연녀에게 "나 오늘 밤 여기서 자도 좋지?" 묻자 쥐처럼 벽장에 숨은 남편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용히 입술을 깨문다. 관객이 직접 불륜남을 골탕 먹이는 듯한 발랄한 연출이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찔레꽃'은 주말 아침드라마 저리 가라 할 막장극. 스물두 살 처녀 '정순'이 은행장 '조만호'의 집에 가정교사로 취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 조만호는 아픈 아내를 두고 기생집을 들락거리며 친딸보다 어린 가정교사에게 욕정을 품는 난봉꾼이다. 정순의 애인 민수는 정순이 조만호와 동침했다고 오해한 후 조만호에게 복수하기 위해 조만호의 딸 경애와 약혼한다. '빌런' 조만호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 정순, 정순과 엇갈리는 민수, 민수를 사랑하는 경애의 이야기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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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공연 사진. 배우 남명렬은 '찔레꽃'의 조만호, '고행'의 '남편'을 연기한다. 사진 서울연극협회·양동민

만담가를 연상시키는 해설자 두 명이 극의 사이사이에 등장해 스토리를 요약하거나 해설하며 재미를 더한다. 리액션 좋은 친구와 함께 '매운맛'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밴드가 1930년대 동요, 만요(코믹송), 신민요, 가요 등을 라이브로 연주하며 극의 분위기를 살린다.

음악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는 2021년 서울 중랑문화재단의 낭독극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안나 연출가가 김말봉의 생애와 대표작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 등 3편을 중심으로 대본을 썼다. 낭독극으로 호평을 받은 뒤 2022년 산울림 소극장 초연을 거쳐 지난해 대학로에서 재연했다. 올해는 서울연극제에 이어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도 초청받았다. 25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공연 후 31일 의정부 예술의전당, 다음 달 4일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으로 순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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