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父 죽이고 싶었다" 이문열의 고백…작가는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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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더중플 - 이문열, 시대를 쓰다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았고, 누구보다 격렬하게 미움 받았던 작가 이문열.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이문열, 시대를 쓰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2)입니다. 이문열의 회고록 가운데 그의 뿌리가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추려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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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한 어린 영혼을 들쑤셔, 말과 글의 그 비실제적 효용에 대한 매혹을 기르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모방의 열정과 그 허망한 성취에 대한 동경으로 들뜨게 한 것일까. 스스로의 문학적인 재능에 대한 과장된 절망과 또 그만큼의 터무니없는 확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소중한 젊은 날을 탕진하게 한 뒤, 마침내는 별 가망 없는 언어의 장인(匠人)이 되어 남은 긴 세월 스스로를 물어 뜯으며 살아가게 만든 것일까."
-이문열 산문집 『사색』(1991)

서른 넘어 문단 말석에 이름을 얹은 후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 나는 숱하게 저 질문에 시달렸다. 당신은 어쩌다 말과 글을 평생의 도구로 선택하게 됐나. 왜 작가가 됐느냐는 질문인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 어쩌다 내 앞에 놓인 숱한 가능성 중에서, 투입과 산출의 균형이 현저하게 깨져 있는 감정적 생산을 나의 일로 결정하게 됐는지. 젊은 날 통과의례처럼 한 번은 대면하고 넘어갔어야 할 질문을 그냥 지나쳐버린 나는 작가가 된 후에도 그에 대한 답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곤 했다.

너무 일찍 찾아와 허망하게 끝났는데도 가슴속에 오래 살아남은 첫사랑이나, 삽시간에 타올랐다가 빠르게 사그라져버린 불같은 사랑의 추억도 내가 작가가 된 원인의 하나로 꼽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경험이 곧 작가를 길러내는 것이라면 세상은 시인과 작가로 넘쳐나지 않겠나.

마흔줄에 들어서야 내가 작가가 된 원인을 나의 피와 기질, 환경에서 찾아보려 했다. 연좌제의 고통과 극심한 가난, 정착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도는 나날을 물려준 나의 아버지에게서 말이다.

생전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월북하기 전, "세상이 좋아지면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더 해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말하셨다. 이념의 싸움이 잘 풀리면 풀리는 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잘 풀리지 않는 대로 혁명 투쟁에 관한 장엄한 서사시를 쓰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조국은 나에게 실존이다."

1987년 조총련 출신의 고향 친지를 통해 전해 받은, 북한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는 그런 문학에의 경사(傾斜)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글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았은 듯한, 아버지 편지의 한 구절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했던 우리 문중의 이병각 시인은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조지훈 등 당대 민족시인들과 교류했다. 사촌 이병철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다. 내 큰형도 한때 시인 지망생이었다. 내 문학적 기질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유산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 분명하다.

가장의 부재, 그로 인해 한 파산(破産)에서 또 다른 파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불안정한 가계(家計), 그러다 보니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빈둥거리며 책을 읽거나 몽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이었던 환경 역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무시하지 못할 계기의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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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아버지 편지에 충격 받았다” 이문열은 왜 작가가 됐을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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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작가. 경기도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권혁재 기자

아버지 이야기를 쓰자, 시대와의 불화가 시작됐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꼭 하고 싶은, 그러기에 평소에는 오히려 더 가슴 깊이 묻어 두게 되는 하나의 얘기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 '그 얘기'는 바로 남로당 중간 간부였던 아버지 이동영을 모델로 한 장편 소설 『영웅시대』, 아니 6.25를 전후한 우리의 불행한 가족사였다. 말이라는 무책임한 그릇에 담긴 생각의 다발에 불과할 뿐인 이념이, 어떻게 피 묻은 칼이나 화약 냄새나는 총이 되는가. 그것이 소년 시절 이래 내 오랜 관심사였다. 그러나 『영웅시대』 연재를 마친 나는 3년간 절필을 선언했다. 『영웅시대』를 표적으로 한 나에 대한 집요한 비판이 한 원인이었다.

▶‘영웅시대’ 월북 부친의 초상, ‘시대와의 불화’ 시작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3994

얼굴도 몰랐던 아버지가 남긴 연좌제

1950년 9월 아버지가 월북했을 때, 나는 생후 2년 3개월에 불과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몰랐다. 어머니가 몇장 안 되는 아버지 사진을 모두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공산주의 부역은 우리 가족에게 원죄처럼 씌워졌고, 끊임없이 경찰의 소재 파악에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꿈이나 이빨이 뭉텅 빠지는 꿈을 꾸면 그날로 이사를 서둘렀다. 어린 나는 일찌감치 뿌리 뽑힌 신세가 되었다.

▶어머니는 뱀꿈 꾸면 짐 쌌다…‘빨갱이 아버지’가 새긴 원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077

추천! 더중플 - 이문열, 시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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