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 내 그릇에 우주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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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안국동 아라리오갤러리 전시장에서 '스투파' 작품 앞에 앉은 수보드 굽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납작하게 찌그러뜨린 알루미늄 냄비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커다란 금속 캔버스가 되었다. 그 위를 수 놓은 것은 파란 냄비와 노란 우유통, 그리고 스테인리스 프라이팬. 실제로 누군가 쓰던 그릇과 주방 용기들이다. 부조 형태의 이 작품의 제목은 '프루스트 맵핑(Proust Mapping)', 우리 말로 쉽게 풀면 '기억의 지도 만들기'다. 작가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프루스트 효과'(특정 감각으로 무의식 속에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현상)에서 이 제목을 따왔다. 인도의 현대 미술가 수보드 굽타(Subodh GUPTA·60)의 신작이다.

인도 현대 예술가 수보드 굽타#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 개인전 # '이너 가든' , 10월 12일까지#일상 사물을 반짝이는 조각으로#

굽타의 개인전 '이너 가든(Inner Garden)'이 서울 안국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4일 개막해 10월 12일까지 열린다. 한국에서 10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굽타는 흔한 일상의 사물을 재료로 한 특유의 작품으로 국제 미술계에서 '스타'로 부상했다. 특히 그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는 신념 아래, 그릇과 냄비 등 허름하고 낡은 잡동사니를 모아 세계화와 도시화, 그리고 삶을 성찰하는 도구로 써왔다.

'평범한 사물의 힘'을 보여준 그의 도발은 세계에 통했다. 굽타의 작품은 국제 비엔날레에서 소개됐고, 현재 그의 작품은 테이트 컬렉션(영국), 구겐하임미술관(미국), 퐁피두센터(프랑스), 루이비통재단 미술관(프랑스), 프랑수아 피노컬렉션(프랑스), 아라리오뮤지엄(한국)등에 소장돼 있다. 제주 아라리오뮤지엄에 두 개 층에 걸쳐 전시된 길이 20m가 넘는 대형 배(boat) 작품이 바로 그의 것이다.

'정원'이라는 키워드를 넣은 이번 전시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그는 인도 불교의 전통 건축물 중 하나인 '스투파(Stupa)'를 석고와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등 주방 도구를 건축 재료로 써서 제작했다. 이와 함께 우아한 조각 '이너 가든' 연작을 선보였다.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금속 꽃 조각이고, 가까이서 보면 숟가락과 주걱의 향연이다.

스투파는 작은 무덤 같기도, 석고로 지은 미니 오두막 같기도 하다. 스투파는 본래 석가모니의 불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그 원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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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드 굽타는 "코로나 19를 겪고 나니 작품에 꽃이 등장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거리나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잠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왜 스투파인가. 
몇 년 전 인도 라다크에 갔다가 많은 스투파(탑)가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보고 압도됐다. 스투파는 수도자들의 사리나 유물을 담고, 그곳을 찾는 불교도들은 스투파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한다. 이 안엔 사람들이 신성한 것에 바치는 기원이 담겨 있다. 
당신은 석고에 금속 식기를 섞어 스투파를 만들었다. . 
실제 스투파는 하얗게 지어지지만, 난 여기에 철제 도시락통, 냄비 등 실제로 가정에서 쓰이던 것들을 섞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평범한 그릇에 묻어 있는 삶의 흔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거기 있다. 
'프루스트 맵핑'도 금속 부엌 용품으로 만들었는데.  
그릇을 통해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손금이 다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다르듯이 기억도 다 다르다. 그게 역사다. 내 작품에 담긴 주방 용기들이 사람들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길 바란다. 
일상의 사물 중에서 특히 부엌에서 쓰는 물건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난 어렸을 때부터 요리를 해왔고, 지금도 요리를 한다. 심지어 파리에서 전시가 열렸을 땐 내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에서 요리 퍼포먼스를 했다. 요리는 주로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을 먹게 하기 위해 행해진다. 우리가 살아가게 하는 데 중요한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고 했는데.  
나는 인도에 흔한 소똥으로 작품을 만들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소가 신성한 존재다. 소똥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집안에 제사가 있을 때면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풀과 망고 잎, 소똥을 주워왔고, 어머니는 소똥을 반죽해 가네샤(인도 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행운의 신)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소똥을 말려 연료로도 쓴다. 내 주변에 있는 가장 흔하고 성스러운 소똥이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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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드 굽타의 '이너 가든' 연작. 일상에서 쓰이는 숟가락과 주걱이 꽃이 되었다. 아라리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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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갤러리 전시장에 벽에 뒤에 '프루스트 맵핑' 연작이 걸려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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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드 굽타의 전시는 서울 아라리오갤러리 지하 1층과 1층, 3층 등 3개 층에 걸쳐서 열린다. 아라리오갤러리

그는 "1990년대 후반 소똥으로 만든 작품이 일본 전시에 초청 받아 4개월 동안 서류가 오갔으나 일본 정부가 '소똥'은 들일 수 없다고 해 나중에 점토로 만들어야 했다"며 웃었다. 굽타는 또 "내가 국제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데 한국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한 이후 해외 전시 초청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당신의 작업에 영향을 준 것은.  
나는 노동자 계급에서 태어나 자랐다. 주변에 예술가 한 명 없었다. 나를 예술가로 만든 건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생활과 경험 그 자체다. 처음엔 다른 재료도 쓰긴 했지만, 주로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사물을 가지고 작업하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다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술가가 됐냐"는 질문에 굽타는 "어릴 때 어머니가 나를 극장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 그때 공연에 빠져 16살 때부터 21살 때까지 5년간 연극을 했다"고 답했다. 이어 "당시 연기를 하며 무대와 포스터를 다 같이 직접 만들었다. 내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또 "돈을 벌기 위해 상업 미술을 배우려고 예술대학에 들어갔다"는 그는 "선배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순수 미술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조각 작업에 앞서 16년 간 그림을 그렸다는 그는 이번 전시에 회화도 함께 선보인다.

그는 또 "대부분의 내 작품은 13세기 이슬람 시인 잘랄루딘 루미, 15세기 인도 시인인 카비르(Kabir)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릇(vessel)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 말한 것도 카비르였다. 그릇 하나, 꽃 한 송이에도 우주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어 "예술가로서 가장 심플하면서 강력한 작품을 만드는 게 제일 어렵다.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면서 "예술가에게 단 한 번의 생애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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