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관치가 부른 금리 왜곡…9시 땡하면 은행앱 대출 오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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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금리와 좋은 대출조건(한도)’을 찾기 위한 금융 소비자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사진은 은행의 대출 창구.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은행 대출창구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서울 동작구 A 아파트를 계약한 이모(38)씨는 요즘 iM뱅크(옛 대구은행) 주택담보대출(주담대)를 받기 위해 공을 들인다. 주담대 접수 개시 시간에 맞춰 앱을 통해 대출을 신청하는 ‘오픈 런’을 일주일 째 도전 중이다. 3% 중반대를 넘어선 국민은행 등 5대 시중은행과 달리 iM뱅크에선 연 3.25%에 대출을 받을 수 있어서다. 이씨는 “9시 딱 맞춰 접속하는데도 매번 대출이 마감됐다고 나온다. 명품 브랜드 ‘오픈 런’보다 경쟁이 치열하다”며 “다음 달에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며칠 더 해보고 안 되면 보험사나 2금융권 등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낮은 금리와 좋은 대출조건(한도)’을 찾기 위한 금융소비자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은행권이 대출금리 인상에 이어 한도를 줄이는 대책을 쏟아내며 ‘대출 문’을 좁히면서다. 가파르게 오르는 수도권 집값을 잡기 위해 금융당국이 노골적으로 대출 시장에 개입한 게 불씨가 됐다. 특히 기준금리 인하 기대에 시장 금리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대출 금리를 끌어올리는 정부의 엇박자 정책에 금융소비자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최근 중도상환수수료 전액 면제를 내건 카카오뱅크에서도 ‘오픈 런’ 수요가 몰린다. 이른 아침인 오전 6시부터 카카오뱅크 앱에서 주담대 접수를 받지만, 대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2분 차이로 접수가 끝난다. 대출 수요 폭증에 카카오뱅크도 시중은행의 대출규제에 동참했다. 3일부터 대상자 조건을 무주택자로 변경했고, 주담대 대출 만기도 최장 50년(만 34세 이하)에서 30년으로 단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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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돈을 빌리기 위해 은행 창구를 돌아다니는 이른바, ‘대출 유목민’은 더 늘 수 있다. 한 은행이 대출을 죄면, 다른 은행으로 쏠리는 풍선효과가 1금융권을 시작으로, 보험사 등 2금융권으로 번질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대출 한도에 여력이 있던 은행도 대출을 서서히 죄고 있다. NH농협은행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농협은행  가계대출 잔액은 올해 경영계획 목표치(124조원)보다 낮은 123조원이었다. 하지만 주요 시중은행이 다주택자 대출 중단, 대출 만기 단축 등의 각종 대책을 내놓자 대출 수요가 규제가 덜한 농협은행으로 쏠린 것이다. 농협은행은 오는 6일부터 다주택자(2주택 이상)의 수도권 소재 주담대를 한시적으로 중단한다. 또 갭투자를 막기 위한 조건부 전세자금대출도 당분간 취급하지 않는다.

2금융권 풍선 효과 우려가 커지면서 삼성생명은 3일부터 기존 주택 보유자에 대해선 수도권 주담대를 제한하기로 했다. 1주택자가 주택 처분을 조건으로 대출을 받는 것도 허용하지 않기로 하면서 무주택자에 한해서만 대출 통로를 열어줬다. 은행권에서 대출이 막힌 수요자가 보험업계의 주담대 문을 두드리면서 2금융권마저 문턱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금융소비자의 혼란도 커지고 있다. 은행별로 대출 금리는 물론 주담대 제한 정책의 시기나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대출자라도 은행 창구와 대출 시점에 따라 한도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주택이 있는 경우 주담대를 제한하는 은행도 있지만, 2주택 이상부터 대출이 막히는 은행도 있다. 일괄적인 기준이 없는 만큼 소비자가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익명을 원한 은행권 관계자는 “요즘 대출 창구에선 은행의 한도와 금리 등 기본적인 대출 조건 문의가 가장 많다”며 “은행마다 대출 문턱이 달라서 휴가를 내서 대출 상담을 받는 직장인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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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금리 왜곡에 소비자의 손해도 커진다. 예금 금리는 계속 하락하는데 대출금리는 홀로 뛰고 있어서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지난달 30일 예금 상품(하나의 정기예금) 금리를 최대 0.2%포인트 인하했다. 지난 6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1년 만기 기본금리를 0.15%포인트 낮춘 데 이어 이번에 2ㆍ3년 만기 금리를 내렸다. 지난달 초 국민ㆍ신한ㆍ농협은행도 예금금리를 0.2~0.3%포인트 인하했다. 5대 시중은행의 지난달 평균 예금금리(1년 만기)는 연 3.41%로 기준금리(3.5%) 밑으로 떨어졌다. 금리 산정 기준이 되는 1년 만기 은행채(AAA) 금리가 기준금리 인하 기대에 지난달 말 연 3.359%로 연초(3.7%)보다 0.341%포인트 하락한 영향이다.

하지만 대출 시장은 반대로 움직였다. 5대 시중은행의 주담대 혼합형(5년 고정) 금리는 2일 기준 연 3.68~6.08%로 최고 금리가 6% 선을 넘어섰다. 하단 금리도 두 달 사이 0.75%포인트 뛰었다. 당국의 가계대출 관리 압박에 5대 시중은행이 지난달부터 대출 가산금리를 20여 차례 이상 인상했기 때문이다. 시장금리가 하락할수록 은행권의 예대차익(대출금리-예금금리)만 확대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달 25일 ‘은행권의 손쉬운 금리 인상’ 질책과 함께 ‘강한 개입’을 선언한 이후 금리 왜곡은 심화하고, 소비자 혼란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의 대출 옥죄기가 자칫 대출 실수요자는 물론 금융 취약계층인 중ㆍ저신용자까지 고금리에 몰릴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집값 상승 기대가 사그라지지 않는 상황에선 대출 수요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지방은행과 보험사 등 2금융권으로 이동하는 풍선효과가 나타난다. 정부가 대출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규제를 금융권 전반으로 확대할 경우 ‘대출 절벽’도 나타날 수 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도한 대출 규제는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를 깨고 과거 2021년처럼 ‘대출 절벽”이 현실화될 수 있다“다며 “실수요자 피해나 중ㆍ저신용자의 금융 소외가 강화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가계 빚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도 “가계대출 총량을 정해서 관리하는 식으로 하다 보면 실수요자가 대출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며 “특히 지난 정부의 대출 총량 규제를 돌이켜 보면 은행은 한정된 대출을 신용과 소득이 높은 사람 위주로 해주는 경향이 있어 중ㆍ저신용자는 대출이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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