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헬조선’ 탈출 꿈꾸는 여자, 버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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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한국 경쟁 사회에 지친 계나는 뉴질랜드로 떠난다. [사진 엔케이컨텐츠 ]

20대 후반의 직장인 계나(고아성)는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한다. 가난해도 화목한 가족, 다정한 남자친구를 뒤로 한 채, “여기서는 도저히 못 살겠어서”라는 게 이유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장강명 작가의 2015년 동명 소설 원작 영화 ‘한국이 싫어서’다.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첫 공개 뒤, 올 초 영국 BBC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 ‘토킹 무비스’가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와 함께 한국 현실을 담은 젊은 영화로 소개했다.

“배고프고 춥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계나에게 한겨울 인천 집에서 서울 강남까지의 출퇴근은 고단하고, 상사의 비리에 동조해야 하는 직장생활은 갑갑하다. 남자친구 지명(김우겸)이 경쟁이 심한 한국 사회를 잘 버텨내는 사람이라면, 계나는 순간순간의 행복감을 중시한다. 지난달 언론 시사 후 간담회에서 주연 고아성(32)은 “계나가 마냥 착하거나 피해자성이 도드라진 역할이 아니란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각본·연출을 맡은 장건재(46) 감독은 “한국 사회의 고난 포르노그래피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질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며 “계나가 삶의 지반을 바꾸면서까지 찾으려 한 게 뭔지,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세계관을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일 합작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 흑백 영화 ‘5시부터 9시까지의 주희’(2023),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괴이’(2022) 등으로 주목받은 그를 개봉 전 만났다. 장 감독은 9년 전 원작이 출간되자마자 읽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헬조선’이란 자조적 신조어가 유행했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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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재

장 감독은 “계나는 평범해 보이는 20대 후반 직장인이지만, 운 좋게 생존한 여성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2024년 서른을 맞는 계나는 10년 전 또래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다 죽는 걸 목격했고(세월호 참사), 20대가 돼선 강남역에서 또래 여성이 모르는 사람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겪는다. 직장 시절엔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다. 배경을 원작의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바꾼 데 대해 그는 “뉴질랜드는 여성 총리가 재임 중 출산 휴가를 가질 만큼 여성인권 지수가 높은 나라여서”라고 설명했다.

계나가 현지에서 시민권을 취득하는 원작 결말은 비틀었다. 공무원 준비생인 대학 동창의 죽음, 뉴질랜드의 지진과 교민 가족의 참사 등 원작에 없던 사건들이 계나를 제3국으로 향하게 한다. 장 감독은 “현지 유학생들, 교민 사회를 취재해보니 도돌이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유학원을 운영하는 생활력 강한 한인 아내(김지영)와 달리 이민 생활에 적응 못 하는 남편(박성일) 모습은 장 감독이 현지 취재로 새롭게 빚어냈다.

한국에서 계나와 정반대의 미래를 꾸려나가는 지명은 장 감독이 “건강한 보수 20대 청년 모델”로 상정한 캐릭터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무언가 다음 단계를 꿈꿔볼 수 있는, 납득할 수 있는 인물을 탈(脫)한국을 꿈꾸는 계나와 나란히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정한 삶의 선택을 두둔하기보다는 각자 성향과 가치관에 맞는 삶을 추구하는 걸 응원하는 게 영화의 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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