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The Butter] 자원봉사는 어떻게 세계기록유산이 됐나

본문

9월 한 달 ‘자원봉사아카이브 10주년 특별전’ 열려

17254847503426.jpg

2007년 12월, 서해안의 한 해변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해상에서 발생한 원유 유출 사고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기름띠는 조류를 타고 해안으로 밀려왔다. 이들은 추위와 악취 속에도 바닷가 곳곳의 바위와 자갈에 달라붙은 기름때를 닦고 또 닦았다. 파도가 한 번 치면 바위에 검은 기름때가 다시 묻었지만 멈출 순 없었다.

자원봉사자 물결은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됐다. 누적 봉사자는 123만 명에 이른다. 지난 2022년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위원회는 당시 피해 복구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등재 기록물 이름은 ‘태안 기름유출 복구 기념물(TAEAN OIL SPILL RESTORATION MEMORIAL)’. 유네스코는 “사고 발생부터 복구까지 전 과정을 기록한 방대한 기념물”이라며 “특히 자원봉사자 123만 명 참여로 단기간에 복구를 이뤄낸 성숙한 시민의식이 잘 나타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사고 발생 15주년이던 해, 차곡차곡 모아둔 기록은 유산이 됐다.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자원봉사아카이브 10주년 특별전시’가 시작됐다. 9월 한 달간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서해안 유류피해 복구 사진을 포함해 우리나라 자원봉사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주요 기록물들이 소개된다.

김의욱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은 “수많은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변화의 순간을 담은 자원봉사 기록물을 지난 10년간 ‘자원봉사아카이브’ 플랫폼에 정리했다”면서 “역사 속 주요 사건, 자원봉사자의 경험 등을 발굴하고 정리해 공공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개인의 이야기, 역사가 되다

전시장에서는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에서 보존한 사진과 영상 자료부터 개인과 단체가 기증한 현장 물품까지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광복 이후 1950~1960년대 기록물에는 수재민을 돕는 전국적인 구호 활동이 돋보인다. 1963년 대한뉴스 제424호에는 영호남 지역의 수재민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무료 진료반의 모습과 구호품 모집운동 영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0년대에는 대학생들의 농어촌 봉사활동이 눈에 띈다. 여름방학을 맞아 농촌 마을을 찾은 대학생들이 일손을 도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을 담장과 지붕을 개량하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한 봉사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성황리에 마무리한 봉사자들의 힘은 1988년 서울올림픽, 1993년 대전엑스포 등으로 이어졌다. 서울올림픽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는 총 2만7221명이다. 당시 조직위원회에서 투입한 전체 인력의 약 55% 수준이다. 이들은 관람객 안내, 행정, 차량서비스, 통·번역, 분실물 처리, 숙소 청소 등 현장 곳곳에서 활약했다.

전시에서는 서울올림픽 자원봉사자였던 이장원씨가 기증한 물품들을 만날 수 있다. 통·번역 요원에게 지급됐던 녹색 재킷, 넥타이, 벨트, 깃발, 자원봉사자 출입증까지 다양하다. 그는 “개인의 봉사활동이 사회적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라며 “아주 짧고 사소한 기록이나 사진 한 장이라도 기억을 되살리고 자원봉사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자원봉사 활동이 시민 주도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민간봉사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4년 전국자원봉사대축제 관련 기록물을 보면 ‘1년 중 하루라도 봉사에 참여하자’는 취지에 맞춰 한 해 32만여 명이 자원봉사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해외 자원봉사 파견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2000년대에는 허베이 스피릿호 원유유출사고 복구 봉사(2007), 세월호 참사 현장 지원(2014), 평창동계올림픽 지원(2018), 강원 동해안 산불피해 봉사(2018), 코로나 팬데믹 지원(2020) 등 사회적 위기 때마다 봉사자들의 힘으로 극복해 왔다.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유산

전시에는 시민들이 기증한 기록물들도 대거 포함됐다. 자원봉사 조끼, 수재 의연금 증서, 개인 봉사일지 등 한 시대를 살아낸 시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기록물들이다.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는 ‘자원봉사 순간을 담은 장롱 속 사진을 찾습니다’ ‘나의 첫 자원봉사 기록물을 기증하세요’ 등의 메시지로 아카이빙 사업의 시민 참여를 독려했다. 이렇게 10년간 수집한 기록물이 총 1만7862건에 이른다.

최근 사업 10주년을 맞아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가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자원봉사아카이브 홈페이지 월간 방문객은 1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교육자나 연구자들이 자원봉사 기록물을 활용하는 빈도가 높았다.

시민의 아이디어로 진화하는 자원봉사 현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들도 눈에 띈다. 최근에는 조깅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을 넘어,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해양쓰레기를 수거하는 ‘플로빙’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공통의 관심과 취향으로 모인 ‘팬덤’도 자원봉사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BTS 팬덤인 ‘아미’들은 2022년 부산엑스포 유치 기원 콘서트에서 자발적으로 ‘팀아미 봉사단’을 결성해 안전·의료·통역 요원을 배치하고 전 세계에서 온 5만여 명의 관객을 안내했다. 가수 임영웅 팬클럽 ‘영웅시대’는 지역별로 대면 봉사모임을 만들어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김의욱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은 “자원봉사아카이브는 자원봉사의 경험과 성과를 융합하는 경험발전소로, 자원봉사 생태계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플랫폼”이라며 “많은 시민이 이달 열리는 ‘자원봉사아카이브 특별전’을 찾아 자원봉사의 흥미로운 역사를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원봉사기록의 행간을 읽다

17254847505124.jpg

윤순화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사무처장

코로나 시기 어느 여름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혹시 희망달서 소식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신 분 맞죠?’ 25년 전 지역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 해당 구청에서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소식지를 창간했었다. 당시 재능봉사로 초대 편집위원을 맡았는데, 최근 300호 발간 기념으로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소식지에 기록된 편집위원 이름을 보고 수소문하여 연락하게 되었단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복지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사회복지사로서 가졌던 사명감, 그리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기억에서 소환할 수 있었다. 지나온 나의 이력을 돌아보게 되었고, 잊지 않고 기억해 준 분들로 인해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전국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1365 자원봉사포털의 하루 접속자 수는 8만 명을 넘는다. 매일 봉사활동 기록은 문서로, 사진으로, 박물로 저장된다. 이야기로도 기억된다. 자원봉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자원봉사자들에게는 일상에서 수행하는 자신들의 자원봉사활동도 기록이 될 수 있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구술자료와 인터뷰 영상, 현장 영상 등 수집 기록을 활용하여 콘텐츠를 제작하고 확산함으로써 자원봉사자에게 자긍심을 갖게 한다. 시민들에게는 자원봉사 참여를 독려할 수 있다. 단체·기업·개인 등의 기록은 다양한 계층의 자원봉사활동 경험을 보존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자원봉사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교재가 되고 기록된 정보는 연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주요 사건에 따른 공식적인 참여 현황과 활동사진 등 일부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특히 위기의 순간에서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은 우리 사회의 경험자산으로 기록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는 2014년 자원봉사 기록물을 시민문화의 역사적 사료로 자원봉사의 가치를 보존하고, 자원봉사 정책 수립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기여하기 위해 자원봉사아카이브를 개설하였다. 현재 1만7223건의 기록물을 등록하였으며, 연간 이용자 수는 9만2645명이며, 30개소의 공동운영기관이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2022년 11월 26일, 자원봉사아카이브 소장기록물 중 ‘태안 유류피해 극복 기록물’ 132건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기록을 통해 한국의 자원봉사를 홍보하고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위기 속에서 자원봉사는 어떻게 서로를 돕고,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지키고, 공동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록으로 기억한다. 특히 기록은 그 시대 특유의 사회적 상식이 포함된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따라서 자원봉사아카이브는 ‘기록보존’의 의미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시민들과 소통하고 기록에 담긴 ‘공유된 가치’를 확산하여 새로운 문화와 윤리를 생성해 나가는 역할을 하는 살아있는 아카이브(living archives)를 지향하고 있다.

10주년을 맞아 기록물을 활용한 특별전시를 9월 한 달간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기억-기록-다시 빛나다’를 주제로 전시한다. 현장에 찾아오는 시민들에게 자원봉사의 가치를 기록으로 전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만한 콘텐츠 중 하나는 123만의 인간띠로 기적을 만들어냈던 태안 유류피해 극복 기록물이다. 만리포해변에서 기름 묻은 돌을 닦던 각자의 경험을 되살리고 추억으로 환대받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38,440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