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갤러리가 된 매장... 새로운 '공간 미학' 제시하는 셀린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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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는 공간에도 발현된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겸 아티스틱 디렉터인 에디 슬리먼이 주도한 새 컨셉 매장은 아트프로젝트를 통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현장은 올해 말, 한국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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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매디슨 애비뉴의 셀린느 부티크. [사진 셀린느]

지난 2019년 초 셀린느는 미국 뉴욕 메디슨 애비뉴 부티크를 열면서 새로운 건축 디자인 컨셉을 선보였다. 공개된 매장은 고급스러운 천연 재료들을 대조적으로 배치해 균형감과 공간감을 구현한 점이 특징이다. 직선으로 질주하는 금속 파티션이 미래지향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면, 본연의 속살을 드러낸 자연 소재는 태초의 날 것 그대로 숨 쉰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를 과감히 모은 지점에서는 설계자의 대범한 면모마저 느껴진다. 스토어 컨셉은 에디 슬리먼이 이끌었다. 그는 패션계에서 이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미술사를 전공하고 사진가로도 활동하며 여러 분야를 통틀어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왔다. 셀린느 매장은 그가 축적해 온 예술적 소양을 마음껏 펼칠 무대가 된 듯하다. 기존 패션 하우스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요즘 이른바 ‘추구미’라고 부르는 셀린느만의 미적 공식을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셀린느는 뉴욕을 시작으로 전 세계 동일한 컨의 매장들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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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매디슨 애비뉴의 셀린느 부티크. [사진 셀린느]

새로운 브루탈리즘

공간을 압도하는 건 천연석의 존재감이다. 바닥재로는 최고급 용암석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산 바살티나를 썼고, 상아색 비앙코 라파엘로 대리석과 그레이 트라버틴을 다양하게 조합했다. 석재들은 그 위로 다양한 소재를 얹는데 필요한 주춧돌 역할을 한다. 빈티지 오크 목재, 콘크리트, 스테인리스, 금속 거울 등이 그 위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자아내기 때문. 소재 자체의 질감을 극대화하고 모듈화된 패턴을 적용한 점은 20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았던 브루탈리즘(Brutalism)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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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매디슨 애비뉴의 셀린느 부티크. [사진 셀린느]

브루탈리즘은 건축계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프랑스어로 일컬은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Béton brut)’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날 것 그대로(brut)’라는 이름처럼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이 특징이다. 모더니즘 시대가 저물면서 보다 실용적인 건축물이 각광 받았고 장식을 배제한 단순함과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이 생겨났다. 80년대 이후 사그라들었던 브루탈리즘은 새로운 미감으로 다시 유행하는 중이다. 그 대표 격인 셀린느 매장은 소재의 원형을 드러내는 한편 기하학적 요소를 적용해 한층 감각적인 공간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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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NBS 스토어에 설치된 다니엘 옌센(Daniel Jensen)의 회화작 ‘Definition and Practice’. [사진 셀린느]

동시대와 호흡하는 아트프로젝트

가구는 인테리어에서 중요한 요소다. 슬리먼은 스토어의 컨셉과 맞는 어울리는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거나 디자인 역사상 주목받은 가구를 선별해 배치했다. 나무 소재의 거친 질감을 살린 의자와 직선 요소를 강조한 소파 역시 브루탈리즘 디자인을 지향한다. 매장 곳곳 설치한 예술품도 동일한 맥락으로 존재한다. 셀린느는 2019년부터 지금까지 6년 동안 250여 개의 예술 작품을 전 세계 매장에 선보이는 ‘아트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패션 하우스에 예술 작품이 걸리는 건 흔한 풍경이지만, 셀린느의 경우 동시대 미술 작가를 발굴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큐레이션 한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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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스토어에 설치된 아서 레셔(Artur Lescher)의 조각품 ‘Leo’. [사진 셀린느]

세계 3대 예술품 경매사인 소더비와 협력해 적극적으로 작가를 물색하기도 했다. 제임스 밤포스, 호세 다빌라, 일레인 카메론 웨어, 오스카르 튀아손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들을 주축으로 지금까지 1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이 셀린느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슬리먼은 직접 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안목은 공간·작품·가구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작품과 제품을 둘 다 살린 완급조절 덕분에 셀린느 매장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공간 자체가 한 덩이의 예술품처럼 보이는 효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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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남성 매장에 설치된 기욤 즐로의 회화작 ‘Eyeliner’. 사진 셀린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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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남성 매장에 설치된 기욤 즐로의 회화작 ‘Eyeliner’. [사진 셀린느]

현재 국내에서도 셀린느의 아트 프로젝트를 만나볼 수 있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남성 매장이다. 그곳에 가면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 중인 기욤 즐로 작가의 회화 작품이 걸려 있다. 3D 디자인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작가는 가상 프로그래밍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보고 작품화한다. 그의 시각에서 공간과 표면은 무한하게 확장하는 흑백의 격자로 표현된다. 격자의 기하학적인 패턴은 매장 선반의 수직감과 어우러져 기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올해 말에는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가 문을 여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셀린느가 국내 직진출하며 여는 새로운 플래그십으로, 공간 컨셉은 물론 글로벌 단위로 전개하는 아트 프로젝트 역시 적용할 예정이다. 최근 예술 열기로 더욱 뜨거워진 서울에서, 아트를 더한 셀린느 매장은 어떤 모습일까.

갤러리가 된 셀린느 스토어

셀린느 스토어는 아트프로젝트를 통해 패션과 예술 사이에서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 모인 매장은 마치 갤러리를 방불케 한다. 그중 대표 매장 별 아티스트와 작품을 소개한다.

파리 몽테뉴 & 그레넬 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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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매장에 설치된 데이비드 아다모(David Adamo)의 조각 ‘Untitled’. 오른쪽 벽에 걸린 추상화는 숀 쿠루네루(Shawn Kuruneru)의 회화 작품.

프랑스 파리 몽테뉴 매장에는 사람보다 큰 키의 커다란 나사못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뉴욕 출생인 데이비드 아다모의 작품으로 그는 일상 속 오브제를 새로운 형태로 만드는 조각가다. 작업은 느리게 제거하는 과정이 놓여 있다. 베어 물고 남은 과일, 바람이 빠지고 남은 풍선처럼 남겨진 형태를 청동, 석고, 알루미늄 등 소재로 주조한다. 매장 벽에 걸린 모노톤 추상화는 캐나다 출신 예술가 숀 쿠루네루의 ‘블랙 온 로 캔버스(Black on Raw Canvas)’ 시리즈다. 9세기 중국 화풍과 독일 표현주의 목판화,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접목시킨 작품으로 공간에 적당한 긴장감과 운율감을 선사한다. 화면의 흑백이 상징하는 양면성처럼 밝음과 어두움, 유기적인 것과 정제된 것, 떠다님과 고정됨 사이를 오가며 양분된 세계를 잇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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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그레넬 매장 바닥에는 오스카 투아존(Oscar Tuazon)의 장소 특정적 작품이 설치됐다.

오스카 투아존은 시애틀 출신으로 어린 시절 제재소에서 자란 기억을 바탕으로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만들어왔다. 그에게 나무란 모든 역사를 간직한 매체이자 시간과 장소를 흡수하는 소재다. 2019년 셀린느 그레넬 매장에 설치한 ‘모바일 플로어(Mobile Floor)’는 패션쇼장의 캣워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는 매장 근처 철거 예정인 호텔에서 베르사유 패턴의 마룻바닥을 뜯어와 운송 컨테이너에 결합해 시공간이 응축된 듯한 ‘장소 특정적’ 작품을 만들었다.

런던 뉴본드스트리트 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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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을 닮은 루카스 제로니머스(Lukas Geronimas) 작가의 조각 ‘Column’.

런던 뉴본드스트리트 매장에는 기념비적인 작품 두 점이 전시돼 있다. 루카스 제로니머스는 끈질긴 수공예를 통해 초자연적인 조각물을 만들어내는 작가다. LA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목재 저장소를 찾아다니며 적합한 소재를 발견하곤 하는데, 이를 몇 번이고 개조하는 과정을 거쳐 원래 모양이나 형태를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매장에 놓인 ‘기둥(Column)’은 나무의 묵직한 중량감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두 가지 형태의 블록을 쌓아 기하학적인 패턴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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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라 바비예(Leilah Babirye) 작가의 설치작 ‘Najunga From the Kuchu Ngaali (Crested Crane) Clan’.

이와 대조적으로 레일라 바비예는 아프리카 씨족 문화에서 발현한 토템을 작품의 주요한 언어로 삼는 작가다. 우간다 출신인 작가는 버팔로·영양·악어·치타 등 부족을 상징하는 동식물의 숭배 문화를 작품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상상 속 퀴어 공동체인 ‘쿠추’를 만들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야기 속 구성원들을 조각으로 빚어낸다. 단단하게 연마하고 여기에 고무 튜브로 땋은 머리와 철사 및 알루미늄 캔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얹는다. 이는 뉴욕으로 건너와 한동안 캔을 줍고 자전거 배달을 하며 망명 신청자 신분으로 살았던 시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자신이 나고 자란 우간다의 보편적 문화와 예술가로서의 자아성찰이 그의 작품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무덤덤한 조각 속 표정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마이애미 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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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나 세모(Davina Semo)의 청동 주조 연작 ‘Embody’.

디자인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약 112평 규모의 마이애미 스토어는 지난해 말 재단장을 마쳤다. 매장에 커다란 종이 달려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는 후기 산업사회의 서늘함을 표현해 온 다비나 세모 작가의 작품이다. 그는 종이 울려퍼질 때의 격렬한 느낌과 명상적인 상태에 깊이 매료되어 ‘벨(Bells)’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종은 공동체에 무언가를 알리거나 상징적인 시기를 알릴 때 이용되어 왔다. 매장에 설치된 종은 길고 가는 형태로 가죽으로 감싼 점이 독특하다. 세모 작가는 이 외에도 파리, 런던 스토어를 위한 설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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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아 루스 리(Maia Ruth Lee) 작가의 ‘Bondage Baggage Reader II’.

벽에 걸린 마이아 루스 리의 회화 작품은 강한 오라를 뿜어낸다. 멀리서 보면 악어 등 무늬인가 싶지만 자세히 보면 지도의 형태인 것을 할 수 있다. 한국 부산에서 태어나 네팔 카트만두에서 자라고 지금은 미국 콜로라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세계화 시대에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문화 보존에 대한 작업을 선보인다. ‘지도’는 떠도는 사람들에게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동시에 연상케 한다.

오모테산도 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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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공간에 맞춘 일레인 캐머런 위어(Elaine Cameron Weir)의 설치작 ‘Snake X’.

오모테산도 스토어에는 3층까지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관통하는 뱀 비늘 형상의 작품이 번쩍이며 시선을 끈다. 일레인 캐머런 위어가 2016년부터 지속해 온 ‘스네이크(Snakes)’ 시리즈 중 하나다. 사슬 금속망 위로 에나멜 코팅한 구리 비늘을 하나씩 엮어 길고 유연한 조각을 만들었다. 머리나 꼬리가 없어 허물처럼 보이는데 이는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신화 속 뱀, 우로보로스를 연상케 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영속적으로 자멸하는 존재를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마이애미 스토어에도 다른 버전으로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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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내쉬(David Nash) 작가의 조각품 ‘Serpentine Column’.

매장 공간 한 켠에는 데이비드 내쉬의 목조각품이 묵묵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국 태생으로 1999년부터 왕립미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나무를 주요 소재로 작업한다. 한 가지 철칙이 있다면 저절로 쓰러졌거나 병해, 안전상의 이유로 베어낸 나무, 고목이 된 나무만 사용한다는 점이다. 나무가 가진 특성과 형태를 읽고 유기적인 모양을 끄집어내거나 기둥, 피라미드처럼 기하학적인 모양을 탄생시키기도 한다.도끼·톱·불·물처럼 다양한 연장을 거쳐 세상에 드러난 그의 작품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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