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제까지 이런 대학총장 없었다?…옥스포드 800년 만에 바뀌나 [세계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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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영국 옥스퍼드대 학생들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기 위해 대학 안 자연사 박물관을 점거하던 와중 한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옥스퍼드대가 11월 치를 총장(Chancellor) 선거로 주목받고 있다. 800년간 백인 남성만 맡았던 영국 최고 엘리트 양성소의 수장을 여성이 맡을 가능성이 거론되면서다. 올해는 특히 처음으로 인터넷 투표를 도입해 25만 명 동문·교직원 중 상당수가 투표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아 변수가 커졌다. 과거 총리를 지낸 정치인 7명이 이 자리를 맡았을 정도로 영국 정계의 관심도 높다.

옥스퍼드대 총장은 사실상 명예직이다. 학사 운영은 부총장(Vice-Chancellor)이 총괄한다. 한국 대학의 총장 같은 역할은 옥스퍼드대에선 부총장이 맡고 있어 한국 언론은 옥스퍼드대 부총장을 총장으로 칭하기도 한다. 이 부총장에는 2015년 처음으로 여성이 임명됐다.

그러나 유독 총장직엔 여성이 선출되지 못했다. 일단 선거가 드물다. 이번 선거도 21년 만에 열렸다. 총장직은 죽거나 사임할 때까지 수행한다는 옥스퍼드대의 규정 때문이다.

올해 선거는 크리스 패튼 현 총장이 지난 2월 “오늘날 대학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는 내가 당선됐던 21년 전과 정확히 같지 않다”며 사임 의사를 밝혀 치르게 됐다. 다만 이후 학교 측이 앞으로 뽑힐 총장은 10년씩 직을 맡도록 학칙을 개정해 앞으론 10년 마다 선거가 치러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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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패튼(80) 옥스퍼드대 총장. 마가렛 대처 총리 시절 환경부 장관을 거쳐 보수당 당수, 홍콩의 마지막 총독 등을 역임했다. 그는 지난 2월 "때때로 신선한 눈과 다른 의견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며 옥스퍼드대 총장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후보 30여 명 중 전직 장관 즐비…옥중 출마도 

그간 옥스퍼드대 총장은 영국 사회를 대표하는 거물들이 맡아왔다. 그러다 보니 선거 때마다 총장 후보군 등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올해 선거를 앞두곤 토니 블레어,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등 전직 총리들이 후보로 거론됐다.

그러나 막상 지난달 후보 등록이 마감된 후 이들 전직 총리들이 등록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학교 측이 10월까지 후보 명단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한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스(FT)는 후보자가 30여 명이라고 전했다. 전 보수당 지도자 윌리엄 헤이그, 파키스탄 전 총리 임란 칸, 옥스퍼드 세인트휴 칼리지 학장 엘리시 안지올리니, 변호사·사업가인 마가렛 케이슬리 헤이포드, 전 국무장관 피터 맨델슨이 후보로 등록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전 하원 정보·보안위원회 위원장 도미닉 그리브, 전 교육부 장관 데이비드 윌렛츠, 전 상원의장 자넷 로얄 등도 후보로 등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가운데 텔레그래프, 더 타임즈 등 영국 언론은 첫 여성 수장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안지올리니 학장을 조명했다. 석탄 상인의 딸로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했고, 변호사를 거쳐 스코틀랜드 첫 여성 법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성범죄로 사망한 사라 에버라드 사건을 주도한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옥스퍼드에 지원하는 소외 계층 학생 수를 늘리겠다”는 공약도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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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 안지올리니 옥스퍼드 세인트 휴스 칼리지 학장. 홈페이지 캡처

임란 칸 전 총리의 ‘옥중 출마’도 주목받았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크리켓 스타 출신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등에서 받은 보석 등 6억여 원어치를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판매한 혐의로 3년형을 받았다가 최근 형량이 추가됐다. 말레이 매체는 “법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칸은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도미닉 그리브, 데이비드 윌렛츠, 윌리엄 헤이그 등 유력 정치인이 당선될 가능성도 높다. 키어 스타머 현 총리, 리시 수낵 전 총리 등 유권자인 동문들 중엔 정치권 인사가 많다. 올해 학교 측이 일부 후보를 걸러내는 선거 위원회를 설치해 ‘다양성의 원칙’을 고려하려 하자 보수당 인사 등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강하게 반발해 무산되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바티칸처럼 라틴어로 연설하는 대학(옥스퍼드)에서 전통적 선택을 할 지, ‘깨어난’ 총장이 나올지 관심이 쏠린다”며 “안지올리니가 이기면 첫 번째 여성, 윌리엄 헤이그가 이기면 ‘36번째 윌리엄’ 수장이 된다”고 평했다. 앞서 17세기 최고 권력자이던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 등 윌리엄이란 이름을 지닌 총장이 35명이나 있었다는 얘기다.

FT는 지난 8일 “이번 총장 선거는 역대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며 영국 대학의 자금 압박이 악화된 상황에서 기부금 구축 등이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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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 총장(Chancellor)의 가운에 들어가는 문양. 사진 옥스퍼드대 홈페이지 캡처

☞옥스퍼드대 총장(Chancellor)은 어떤 자리

영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1096년 개교)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옥스퍼드대를 이끄는 수장이다. 옥스퍼드대는 영국 총리 28명 등 전 세계 고위 정치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로 꼽힌다.

총장은 행정권이나 급여는 없지만 공식 행사를 주재하고 차기 부총장을 선출하는 위원회 의장을 맡는 등 자금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세기 나폴레옹을 쓰러트린 워털루 전투의 영웅 아서 웰즐리 전 총리, 20세기 해럴드 맥밀런 전 총리까지 많은 정치인이 총장을 맡았다.

이번에 사임을 표명한 크리스 패튼은 반역죄로 탄핵을 받고 1715년 프랑스로 도피한 제임스 버틀러 공작 이후 재직 중 죽지 않은 최초의 옥스퍼드대 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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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 교직원들. 사진 옥스퍼드대 홈페이지 캡처

그간 총장 선거는 엄격한 관리 하에 치러져 왔다. 동문 50명의 추천 등을 받아야 후보가 될 수 있었으나 엘리트주의 비판을 받은 후 올해부터 누구나 스스로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됐다. 후보자는 옥스퍼드 졸업생일 필요는 없으나, 주요 경쟁자는 모두 졸업생이거나 옥스퍼드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다.

또 이전 선거에선 현장 투표만 가능해 8000명 참가에 그쳤으나 이번엔 온라인 투표가 가능해지며 최소 수만 명이 투표할 것으로 점쳐진다. 첫 투표는 10월 28일 시작되고, 11월 중순에 상위 5명 후보자에 대한 두 번째 라운드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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