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판사 1인당 사건량, 독일 5배인데…법관 증원, 정쟁에 묻혔다 [사법부, 시간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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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누적된 재판 지연의 해법은 법원·변호인·수사기관 등 여러 당사자가 얽힌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나온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12월 취임사에서 재판 지연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재판 지연의 원인은 어느 한 곳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세심하고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엉켜있는 문제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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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대 대법원장. 연합뉴

사법정책연구원은 지난 5월 「재판의 지연 실태와 신속화 방안」보고서에서 재판 외적으론 ①복잡하고 어려운 사건 증가 ②변호사 수 급증 ③미미한 법관 증원 ④법관 노령화 등을 원인으로 진단했다. 재판 절차에서도 ①빈번한 재판부 교체 ②목표 처리 건수 하향 ③적시제출주의 불준수 ④변론·공판의 집중 실패 등을 이유로 지적했다. 하나같이 풀기 어려운 일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힌 것이다.

법원장 재판, AI 도입…조희대 대법 안간힘

이에 조희대 대법원이 재판 지연 해소를 위해 도입했거나 검토 중인 대책도 다양하다. 이 중 법원장이 직접 민사합의부 및 단독 사건 재판을 맡는 ‘법원장 재판’ 제도는 이미 3월부터 시작해 일부 성과를 내고 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1월 취임 때부터 “차세대 사법전산시스템을 통해 재판 지연을 해소하겠다”고 강조했고, 내년 1월 도입을 목표로 ‘유사 사건 판결문(판례) 추천 인공지능(AI) 모델’을 개발 중이다.

AI가 법조 생태계를 위협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에도, 천 처장이 “신속·공정한 재판을 통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은 사법부의 소명”이라며 적극 도입한 결과다. 해당 모델이 개발되면 판사들이 일일이 판례를 찾는 일 등을 AI가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민원인을 대상으로 소송 절차를 알려주는 안내봇 역시 개발 중이다.

이 밖에도 행정처는 재판장의 본안 사건 관련 사무분담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려 심리의 단절을 줄이고 신체·진료기록 감정 비용을 각각 40만원에서 80만원, 60만원에서 120만원으로 2배씩 인상해 감정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또 상임조정위원의 경력 요건을 완화하거나 전문가 조정위원 제도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국회 정쟁에 묻힌 해결책…“재판 지연 비난하면서 손 놔”

이같은 법원의 노력에도 “각론이 재판 지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사와 예산 등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구조적 개선이 필수기 때문이다. 그나마 판사 임용을 위한 최소 법조 경력을 10년에서 현재와 같은 5년으로 유지하는 법안(법원조직법 개정안)이 지난달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한숨을 돌렸다지만 “법관 부족 문제를 현재보다 악화하지 않는 현상 유지책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내년부터 요건을 7년, 2029년부턴 10년으로 확대하는 내용만 취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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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열린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 강정현 기자

구조적 개선의 핵심은 법관 증원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2월 첫 기자간담회에서 “재판 지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법관의 수가 부족하다”며 “법관 증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법정을 오갈 때마다 법관들이 허덕이는 게 눈에 보인다”며 “인원을 안 늘리면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행 판사정원법에 따른 현재 법관 정원은 3214명으로 2014년 후 10년째 묶여있다. 그 사이 사건은 복잡해지고 변호사는 폭증하고, 공판중심주의가 강화했다. 사법정책연구원의「재판의 지연 실태와 신속화 방안」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법관 1인당 민·형사 본안 사건 수는 독일의 약 5.17배, 일본의 약 3.05배, 프랑스의 약 2.36배다.

연구책임자인 이영창(사법연수원 28기) 선임연구위원은 “접수 사건 수와 법관 수를 독일 수준으로 맞추려면 1만2390명 증원, 일본 수준으로 맞추려면 6102명을 증원해야 한다”며 “한국의 법관 수는 각국의 사법제도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향후 5년간 법관 370명을 단계적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판사정원법 개정안은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돼 법제사법위원회 소위까지 통과했으나 결국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판사정원법과 동시에 논의된 검사정원법을 두고 야당이 반대한 데다 당시 ‘채상병 특검법’ 재표결, 국민연금 개혁 등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정쟁을 벌이다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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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법관이 부족해질 때마다 여야가 합심했고 1990년 첫 개정을 포함해 2014년까지 6차례 증원이 이뤄졌다. 처리 기간도 법안 발의 일로부터 15~125일밖에 안 걸렸다. 한 부장판사는 “정치권이 재판 지연을 비난하면서 정작 증원법 통과에 손 놓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이번 22대 국회에선 판사 증원법을 발의한 의원이 아직 없고 대법원이 재추진 중이다.

공판 전 증거를 공개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역시 재판 지연 해소 방안으로 꼽히는 방안이다. 조희대 원장이 청문회 과정에서 “입법화될 경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환영한 제도다. 영미권에서 운영되는 디스커버리 제도는 재판 시작 전에 재판 당사자가 가진 소송 관련 증거를 상호 공개하는 내용이다. 법관이 재판에서 모든 증거를 조사·심리하지 않고 쟁점에 집중할 수 있어 신속한 재판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21대 국회 때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발의했다가 국회 관심 밖에 밀려 임기만료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선 정준호 민주당 의원이 지난 8월 민사 소송에서 핵심 증인을 상대로 사실관계 확인 등 신문할 수 있도록 하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발의한 상태다.

차진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사법부가 내부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는 만큼 국회 역할이 절실한데, 법관 증원도 처리 안 하며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며 “국민의 기본권인 신속한 재판 받을 권리를 위해 이견 없는 법안은 국회가 나서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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