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훈 소설의 허무는 능동적 허무주의" 1주기에 다시 읽는 김미현의 평론들[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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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더 나은 실패
김미현 지음
강지희 엮음
민음사

누군가의 글을 모아 책을 내는 데 엮은이가 필요하다면 둘 중 하나일 공산이 크다. 그의 세계가 방대하거나 죽었거나. 지난해 이맘때(2023년 9월 18일)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김미현(당시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의 '비평(批評) 선집(選集)'인 이 책은 둘 다에 해당되지 않을까. 동어반복이지만 그는 죽었고, 그의 흔적 가운데 일부(선집)만으로도 그 세계가 간단치 않게 느껴지니 말이다.

 김미현은 세 가지 평론을 지향했다고 한다. 읽히는 평론, 문체가 있는 평론, 그 자체로 창작인 평론. 독자 입장에선 일종의 잣대가 마련된 셈이다. 가령 얼마나 창의적인지 따져 볼 수 있겠다. 소설도 안 읽는데 평론이라니. 인생은 문학을 낳고, 문학은 평론을 낳지만, 평론은 문학을 증류시켜 결국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는 엮은이 강지희(한신대 교수)의 말을 믿어보자. 인생 얘기라는데, 소설이면 어떻고 평론이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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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지병으로 별세한 문학평론가 김미현(1965~2023)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연구실에서 제자가 촬영한 모습이다.[사진 민음사]

모두 10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브, 잔치는 끝났다',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 제목만으로도 선집의 지향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각 한국여성문학사, 1990년대 소설 속의 성(性), 여성 작가의 SF를 다룬 글들이다.

 '수상한 소설들'은 남성 독자가 흥미를 가질 만하다. 한국 문학비평이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문열·김훈·박민규 세 남성 작가 소설의 보수적 대중성을 들췄다. 아무래도 김미현은 페미니즘을 논할 때보다 자못 신랄해진 듯한데, 김훈의 『남한산성』이 반역사적 허무주의나 치욕에 대한 소설이라는 생각은 독자의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김훈의 허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수동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허무해지려는 능동적 허무주의, 그러니까 '허무의 허무'라는 것이다. 커피나 담배를 더 잘 즐기기 위해 그것들의 독성을 제거한 다음 즐기는 향락주의자의 허무가 김훈의 허무라고 했다.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는 창의적으로 느껴지는 글이다. 서로 이질적인 천운영의 '그녀의 눈물 사용법', 조경란의 『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미국의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라는 프레임을 활용해 하나로 뀄다. 젠더 트러블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이 이분법적으로 고정돼 있지 않고 해체·교차·연기(演技)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전복적 정치성이 싹틀 수 있다는 시각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육식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합성을 하는 돌연변이체의 동물" 같은 특성을, 젠더 트러블과 연결지었다.

 생전 김미현은 씩씩한 사람이었다. 제자 강지희의 증언도 다르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픈 내색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에서 성공은 없으니 더 잘 실패하는 게 중요하다는 아일랜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따라, '더 나은 실패'를 하려고 했던 글쓰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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