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 ‘눈물 연설’ 하던 서독 현장에 기념 현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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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서독(현 독일)을 찾았다. 서독 정부가 제공한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이륙한 박 대통령은 홍콩(당시 영국령), 방콕(태국), 뉴델리(인도), 카라치(파키스탄),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프랑크푸르트(독일)를 거쳐 28시간 만에 쾰른·본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에는 대통령 전용기는 물론이고 장거리 항공기조차 없었다.
그렇게 서독에 도착한 박 전 대통령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정상회담 직후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타고 뒤스부르크로 향했다.
12월 10일 뒤스부르크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에 파독 광부 300여 명과 간호사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은 ‘눈물의 연설’을 했다. 박 대통령 옆의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한복을 입은 아시아 최빈국의 영부인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당시 서독 신문에까지 게재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해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하자”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격려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 원조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던 아시아 최빈국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불과 103달러 수준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이 군사정변으로 시작된 탓에 한국을 믿고 채권을 사주거나 투자를 해줄 국가도 없었다. 결국 차관을 빌리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했고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뒤스부르크 방문 전날인 1964년 12월 9일 박 전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와 만나 파독 광부와 간호사 임금을 담보로 1억5900만 마르크(약 4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냈다. 이 자리에서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전 대통령에게 “고속도로를 깔고 자동차를 만들 제철소를 지으라”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대로 서독 방문 이듬해인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통해 얻어낸 대일 청구권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를 짓고 포항제철을 세운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 것도 1964년 서독 방문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이와 관련해 이철우 경북지사는 오는 31일 박 전 대통령 서독 방문 60주년을 맞아 ‘눈물의 연설’이 있었던 장소를 찾는다. 포스코에서 제작한 박 전 대통령 서독 방문 60주년 기념 현판도 전달하고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위한 기념행사도 연다.
경북도에 따르면, 이 지사는 가장 먼저 독일 에센(Essen)에 위치한 한인문화회관(파독광부기념회관)을 찾아 파독 광부·간호사 100여 명을 위한 오찬 자리를 마련한다. 한인문화관 일정을 마무리한 뒤에는 뒤스부르크 시청을 방문해 시장과 면담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포스코에서 제작한 방독 60주년 기념현판을 전달하고 연설 장소에 설치해줄 것을 제안할 예정이다.
1964년 박 전 대통령이 연설했던 장소는 뒤스부르크시 스포츠팀에서 체육관으로 활용하고 있어 당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경북도는 뒤스부르크 관할 공원 부지 안에 ‘박정희 정원’(가칭) 조성과 두 지역 발전을 위한 공동포럼 개최도 제안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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