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내가 받은 찬란한 유산”…웅크린 외톨이들 어깨 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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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백서원에서 청년 인문공감 ‘문화 자유 교실’ 참석자 및 관계자이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초상권 보호를 위해 일부 참석자 얼굴은 흐리게 처리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내가 받은 유산, 얼마나 찬란하고 넓디넓은지/ 시간이 나의 소유, 나의 경작지는 시간-.’

문체부 인문 프로그램 열린 여백서원 #고립·은둔 청년들 참가해 담소·산책 #"나도 다른 사람 삶 도와주고 싶어져" #문화예술위 "소외 청년들 적극 지원"

서울에서 승용차로 2시간 거리,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백서원(如白書院). 전영애(73)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2014년 1월부터 가꿔온 ‘책의 집’이자 인문학 쉼터다. 이곳 산책로를 따라 언덕 위 전망대에 오르면 독일 문호 괴테(1749~1832)의 이 같은 시구(詩句)가 작은 팻말에 적혀 방문객을 맞는다.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장이 한국 젊은이들을 위해 골라주신 문장이에요. 한국인이 특히나 쫓기면서 산다고, 시간이야말로 내가 가꿔야 할 재산이란 걸 일깨우셨죠.”

지난 23일 백발의 전 교수가 낭랑한 음성으로 ‘괴테의 글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함께 한 청년들이 귀를 쫑긋 기울였다. 이들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청년 인문공감 ‘문화 자유 교실’(10박11일) 참석자들. 특색이라면 은둔·고립 청년 지원기관의 추천으로 참가했다는 점이다. 총 15명이 여주 숙소에서 숙식하면서 미술·음악·영화·유적지 체험을 통해 그간 웅크렸던 마음을 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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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백서원에서 청년 인문공감 ‘문화 자유 교실’ 참석자 및 관계자들이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의 안내를 받아 서원을 둘러보고 있다. 초상권 보호를 위해 일부 참석자 얼굴은 흐리게 처리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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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백서원에서 청년 인문공감 ‘문화 자유 교실’ 참석자 및 관계자들이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의 안내를 받아 서원을 둘러보고 있다. 초상권 보호를 위해 일부 참석자 얼굴은 흐리게 처리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처음에 쭈뼛쭈뼛 했던 이들은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른 이날은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며 여백서원과 그 일대에 조성 중인 ‘괴테 마을’을 둘러봤다. 특히 서원의 본관이자 멋들어진 전통 한옥인 ‘여백재’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석구석 서가를 채운 수천 권의 장서와 넓은 창을 통해 보이는 자연 풍경에 마음을 뺏긴 듯했다. 천정을 가로지른 대들보에는 ‘맑은 사람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여백은 같을 여(如)에 흰 백(白)을 써서 ‘흰 빛과 같은’ 이란 뜻입니다. 맑은 사람만 온다고도 할 수 있고, 오면 맑아진다고도 할 수 있죠. 아무래도 두 번째 뜻이 더 좋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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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백서원에서 청년 인문공감 ‘문화 자유 교실’ 참석자들이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참가자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어서 전 교수는 여백서원을 짓기까지 힘들었던 시간들, 호가 ‘여백’이었던 부친이 남겨주신 문집과 정신, 배움은 짧았어도 평생 글과 책을 소중하게 대한 모친의 기억을 들려줬다. 마지막으로 그가 전력을 다해 연구한 괴테의 삶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문학세계를 설명하면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잘 키운 사람은 처음 봤다. 그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극복’이었다. 어려움이 있어도 짓눌리지 않고 끝끝내 날아올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젊어선 내가 고생만 한 것 같았는데 나이 들어보니 제 인생에서 받은 게 많아요. 그걸 돌려주고 나누고 싶어서 이곳을 열었으니 언제든 편히 찾아오길 바랍니다.”

한 20대 여성 참가자는 “지난해 대학을 자퇴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캠프 참가한다고 하니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다. 또래 만나서 즐거운 시간 보냈고 카톡 주고받으며 앞으로도 연락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성 참가자도 “일단 책이 많아서 놀랐고, 교수님이 멋진 말을 많이 해주셔서 ‘나도 책 좀 읽고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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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백서원에서 청년 인문공감 ‘문화 자유 교실’ 참석자가 작성한 '10년 후 나에게 쓰는 편지'.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들은 강연 후 ‘10년 뒤 나에게 쓰는 편지’를 쓰면서 캠프 경험을 정리했다. 한 참가자는 “우울증 환자를 위한 책을 내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이렇게 썼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던 어떤 누군가의 노력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던 만큼, 누군가를 위해 내 삶의 일부를 기꺼이 쏟아 붓고 싶다. 10년 뒤에는 더 많이 할 수 있길 바란다.”

한국 사회에선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일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으며 사회관계가 단절된 20·30대 청년들이 급격히 늘었다. 2022년 조사 결과 고립·은둔 위기 청년 규모가 최대 54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는 추정(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나왔다.

이날 현장을 함께 한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급변하는 세상에 소외감을 느끼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청년들이 많다. 이들이 문화예술 체험을 통해 관계 맺기를 할 수 있게 이런 프로그램을 계속 지원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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