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6일 개봉)에서 AP통신 기자이자 우크라이나인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이 러시아군 침공 초기 인접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소녀. 가족과 함께 부실한 지하실로 숨어든 아이는 "죽고 싶지 않다"고 울먹인다. 제공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2022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며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없을 것"이라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공격이 시작된 그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인접 항구 산업도시 마리우폴을 덮친 러시아군의 포탄은 민간인 주택가까지 날아들었다. 피 흘리며 엄마 품에 안겨 온 18개월 아기,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포격에 다리가 날아간 16살 소년은 그날로 모두 숨을 거두고 만다. 폭격당한 산부인과 병동에 있던 만삭의 임산부는 골반에 치명상을 입고, 뱃속에서 이미 죽은 아기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해외 언론 중 유일하게 마리우폴에 남아있던 AP통신 기자들이 3월 15일 탈출하기까지, 20일간 카메라에 담은 참상이다. 6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당시 기록을 94분에 압축한 작품. 우크라이나인이자, AP통신 영상기자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이 죽음의 공포 속에 촬영한 영상에 직접 내레이션‧각본을 겸했다.
은폐될 뻔한 러시아 전쟁 범죄 참상을 바깥 세상에 알린 공로로 AP통신 동료들과 함께 지난해 퓰리처상 공공보도상을 비롯해 올해 초 우크라이나 최초로 아카데미 장편다큐멘터리상,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부문) 등 전세계 영화제 33관왕에 올랐다.

‘전쟁은 폭발이 아니라 침묵으로 시작된다’는 담담한 1인칭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다큐는 첫날 장면부터 전운의 긴박함이 가득하다. 취재진이 전쟁 임박 소식을 듣고 찾은 마리우폴에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자동차, 불타는 주택가 등 포격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자신이 어린 딸의 아버지인 체르노우 감독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부모,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가족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촬영 도중 눈물을 훔치면서도 포격을 피하느라, 카메라가 흔들리고 땅에 내려 놓은 화면도 허다하다.

다큐 '마리우폴에서의 20일'로 올 3월 미국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가운데)은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아도 됐다면 좋았을 거"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AFP=연합뉴스

마리우폴 시내로 진군한 러시아군 탱크는 병원과 소방서, 학교도 무차별 포격한다. 도로와 지하실에 쌓여가던 시신들은 무더기로 도시 외곽 구덩이에 던져진다. 이름도 없이 숫자만 적힌 집단 무덤이 형성된다. 도시 전체에 물‧전기‧난방‧인터넷이 끊긴다.

침공 초기 “뭘 찍냐”며 “꺼져! ‘기레기’야”라고 욕설을 퍼붓던 시민들은 점차 다른 도시의 가족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려 달라고 다가온다. 망연자실한 의사는 “망할 놈의 푸틴에게 이 죽은 아이 눈을 똑똑히 보여주라”며 눈물을 떨군다.
위성 전화로 간신히 전송한 이런 고통과 절규가 실시간으로 외신에 보도되자, 러시아 정부는 “서구 언론이 배우들을 써서 거짓 영상을 찍었다”며 가짜 뉴스로 매도한다. 마리우폴의 한 경찰이 AP통신 기자들의 탈출을 목숨 걸고 도운 것은 이들이 러시아군에 붙잡힐 경우 민간인 공격 영상이 거짓이었다고 말하도록 강요 당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30시간 분량의 취재 영상을 담은 하드 드라이브 및 파일들을 자동차 좌석 아래, 생리대 등에 감춰 러시아 점령지의 검문소를 가까스로 통과했다.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에서 러시아군에 침공 당한 산부인과 병동의 폐허 속 피투성이만삭 임산부 모습이다. 다큐 스틸 사진가로 참여한 AP통신 기자 에우게니이 말로레카는 이 장면으로 러시아군의 극악무도한 공격을 폭로하며 2023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제공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마리우폴 시민들에 대한 증거”(슬랜트매거진) “이 영화를 모든 저널리즘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영국 타임스) 등 외신 호평과 함께 로튼토마토 신선도 100%를 받았다. 올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체르노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며 “수상 영광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 수만 명을 죽이지 않은 세상, 조국과 시민을 지키다 감옥에 갇힌 군인들과 인질들이 풀려나는 세상과 바꾸고 싶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다큐 속에서 촬영을 저지하는 군인들에게 “이건 역사적 전쟁이다.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고 호소하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에는 러시아군의 포탄이 주거지역 아파트와 병원 등을 덮친 장면도 나온다. 체르노우 감독뿐 아니라, 현장 스틸을 촬영한 에우게니이 말로레카, 현장 프로듀서를 맡은 바실리사 스테파넨코 등 러시아 폭격 이후로도 마리우폴에 남아있던 AP 통신 소속 기자들이 전쟁범죄에 신음하는 우크라이나 참상을 기록했다. 제공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다큐에서 그는 탈출 직전에 산부인과 폭격 당시 한쪽 발을 잃은 임산부의 출산 현장을 찾는다. 새하얗게 질린 채 태어난 아기는 한참 만에 우렁찬 울음을 터뜨린다. 여전히 포탄 소리는 건물을 뒤흔들 만큼 가깝게 들려온다.
마리우폴은 러시아 침공 86일 만인 2022년 5월 완전히 점령됐다. 지난해 11월 체르노우 감독은 다큐 제작에 참여한 PBS와의 인터뷰에서 “마리우폴 주택가 90%가 러시아 포격으로 손상‧파괴됐고, 점령 후 러시아 회사들이 도시 재건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밝혔다. “마을에 남은 아이들은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빼앗긴 채 러시아 정부가 해석한 역사를 배우고 있다. 고아가 된 아이들은 러시아에 강제 입양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에 맞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올해 초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를 통해 "이 모든 참상이 러시아가 2013년 우크라이나를 처음 침공했을 때부터 시작됐다"고 짚었다. 다큐는 국내에선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시 상황을 담은 장‧단편 다큐들과 함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공개된 바 있다. 15세 관람가.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에서 전쟁을 의미하는 'Z' 표식을 단 러시아군 탱크가 AP통신 취재진이 잠복해있던 병원을 포위하고 있는 장면이다. 제공 스튜디오 디에이치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