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우리는 재난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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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내 곁의 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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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군 주민들이 담벼락에 붙일 조형물을 만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빛공해 방지용 조명을 설치하는 충남 예산군 봉사자들. [사진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충남 예산군에는 장마철에 물난리를 겪는 마을이 많다. 한밤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가로등은 켜지지 않는다. 불빛이 농작물 성장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다. 벼를 수확하는 가을까지 가로등을 끄고 지내다가 겨울이 오면 다시 켠다.

“이러다 진짜 사고 난다.”

최근 몇 년 새 이상기후로 집중호우가 잦아지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졌을 때도 주민들은 어둠 속을 헤쳐 가며 겨우 마을을 빠져나왔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해결책이 필요했다.

지난해 7월, 기상청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면서 전국에서 약 2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건 초기에 정부가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하고, 언론도 피해 상황을 앞다퉈 보도하면서 긴급 구조와 지원이 이뤄졌지만, 관심이 지속하지는 않았다.

피해 마을을 다시 찾은 건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지난해 12월 예산군자원봉사센터는 봉사단을 꾸렸다. 예산읍·오가면·신암면의 90가구를 방문해 빛공해 방지용 LED 야외조명등을 설치했다. 태양열로 작동하는 은은한 조명은 농작물이 자라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올해 여름에는 밤에 집집마다 가로등이 켜졌다. 주민들은 “농사도 잘되고, 해지고 나서도 마을회관에 나갈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20년 만에 모인 주민들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는 수해 피해지역 주민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는 ‘내 곁의 호우(好友)’ 사업을 지난 1년간 벌였다.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으로 시행된 이번 사업으로 전국에서 약 3000명의 자원봉사자가 호우피해 주민 1만7255명을 만났다.

자원봉사자들은 단순한 피해 복구를 넘어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하고 다음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김의욱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은 “자원봉사의 특징은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세하고 친밀한 방식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자원봉사자들은 현장에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이제는 지역의 재난회복력을 높이는 일감을 찾아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데까지 자원봉사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전국 24개 지역의 마을을 방문해 안부를 묻고 일상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활동을 펼쳤다. 설에는 마을회관에서 떡국을 끓여 주민과 나누고, 명절 선물도 전달했다. 온수기·방한복 같은 방한용품을 지원하기도 했다.

대구 군위군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마을 세 곳을 방문해 축제를 열었다. 기획 단계부터 수시로 주민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묻고 또 물었다. 주민 223명의 응답을 종합했더니 ‘마을공동체를 되살리자’는 의견이 많았다. 봉사자들은 반려식물 심기, 파우치 만들기, 냄비받침 만들기 같은 체험 행사부터 기초건강검진, 미용, 손 마사지 같은 서비스까지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미니 구급함, LED 랜턴 등이 들어있는 키트도 배부했다.

마을부녀회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음식을 대접했다. 박건환 부계면 신화1리 이장은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다 같이 모여서 밥을 해 먹은 게 20년 만”이라며 “호우 피해가 심해서 암담했지만, 오랜만에 주민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는 모습을 보니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임지영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통합자원봉사지원단 팀장은 “자원봉사자들과 가까워진 주민들이 힘든 점이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털어놓으면서 더 효율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용수리에는 마을 정원이 생겼다. 칠곡군은 지난해 8월 태풍 ‘카눈’으로 도로가 유실되고 농경지가 침수돼 32억원 규모의 피해를 본 지역이다. 마을 경관이 망가지면서 분위기도 침체됐다.

지난 4월 칠곡군종합자원봉사센터의 봉사자들은 묘목과 모종을 들고 용수리 마을을 찾았다. 마을 중앙에 방치돼 있던 230㎡(약 70평) 규모의 땅을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서였다. 봉사자들은 사흘간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땅을 고르고 나무와 모종을 심었다. 시큰둥하던 주민들도 한두 명씩 손을 보태기 시작했다. 마을 최고령자인 99세 어르신까지 동참하면서 정원을 돌보는 일은 주민들의 중요한 일과가 됐다. 두 달에 한 번씩은 온 주민이 모여 잡초를 뽑는다.

마을 주민 이현정(47)씨는 “그동안 귀촌한 사람들과 마을 선주민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는데, 정원 가꾸기를 하면서 더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충북 단양군에서도 자원봉사자와 주민들이 함께 호우로 얼룩진 마을 담벼락을 다시 꾸몄다. 봉사단이 도색한 담벼락에 주민들이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매화 모양 조형물을 붙였다. 작업하는 동안 마을에는 다시 활력이 돌았다. 분위기도 경관도 전보다 더 좋아졌다.

재난을 예방하는 자원봉사

전문가들은 “재난으로 힘든 상황을 잘 회복하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더 강해지고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재난심리 연구에서는 이런 내용의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 주목받고 있다. 이윤호 한국재난심리연구소장은 “사회의 도움으로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는 경험을 한 구성원이 늘어나면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더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재난 후 원상태로 돌아오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과정”이라며 “이때 가장 필요한 건 사회적 지지”라고 강조했다.

재난회복에 나선 자원봉사자들은 피해 예방 아이디어를 앞다퉈 내놓기도 한다. 지난 2020년 집중호우로 침수 피해를 본 광주광역시자원봉사센터에서는 2년 전부터 커뮤니티매핑센터와 협력해 ‘하수도 커뮤니티 맵핑’ 봉사를 지속하고 있다. 하수도맵핑은 빗물을 원활하게 배수하기 위해 도로 주변에 설치된 하수구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전용 애플리케이션에 상태를 기록·관리하는 활동이다. 봉사자들은 매년 6~9월 팀을 꾸려 도로 옆 하수도 유입구 점검에 나서고 있다. 담배꽁초·낙엽 등 하수도를 막고 있는 오물을 제거하고 전용 애플리케이션에 사진과 기록을 올린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내용을 확인하고, 추가 작업이 필요한 경우 담당 인력을 파견해 보수 작업을 마무리한다. 올해만 845건의 데이터를 수집해 지자체에 44건의 보수 요청을 했다. 김용철 호남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기후변화로 재난·재해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세밀하고 정교한 예방 활동이 필요하다”며 “자원봉사의 활동 범위를 확대해 적극적으로 예방 활동을 발굴, 추진하면 더 안전한 지역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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