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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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업계에서 1000만원은 상징적인 금액이다. 소액기부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큰돈을 기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모금기관에서도 누적 1000만원을 넘긴 후원자를 잠재 고액기부자로 분류한다.
‘천만클럽’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굿네이버스의 추천으로 특별 회원 모임인 ‘더네이버스클럽’ 가입자를 차례로 만났다. 더네이버스클럽 회원은 론칭 첫해인 2016년 14명으로 출발해 2020년 122명, 올해 10월 기준 278명으로 늘었다.
기부자들 면면을 살펴보면 직장을 다니면서 대출금을 갚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현대중 굿네이버스 대외협력실장은 “정기후원으로 시작했다가 특정 사업에 추가 후원하는 기부자들이 많아졌는데,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해도 오히려 사양하는 분들이 많다”며 “특별한 무언가를 원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부의 가치를 조용히 실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기부로 ‘새로운 실험’을 제안합니다
박윤수(31)씨는 연구원이다. 월급을 받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처음 기부를 시작한 건 3년 전. 국내 아동 지원사업에 월 10만원씩 기부했다. 그러다 목돈 1200만원을 기부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그는 기부금 사용 목적을 학대피해아동들이 머무는 쉼터에서 일하는 종사자 지원으로 콕 짚었다.
“학대피해아동의 보호가 중요한 일인 만큼 지원 시스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스템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 지원하는 것이 효과가 있는지 최대한 빨리 실험해 보고 싶었어요. 더 늦추면 이미 늦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지난 2021년 시작한 정기후원은 쉼터 종사자 지원 사업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1200만원, 추가로 1000만원, 지난해에도 3100만원을 추가 기부했다. 누적 기부액은 5000만원이 넘는다.
그는 적지 않은 기부금을 두고 “내 노력으로 얻는 보상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현재 사회적 위치나 금전적 여유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복지 사각지대를 찾아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소박한 나눔에서 시작된 변화 … 평범한 기부자들의 인생철학
박윤수씨는 “만약 금전적으로 충분하지 못한 환경에서 시작했다면 현재의 위치에 도달했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며 “가족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환경으로 인해 기회를 잃는 존재가 없기를 바라고, 소외된 아이들을 돌보는 쉼터 직원들의 노고 또한 외면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금단체를 선정할 때 ‘특정 지원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사업가나 기업 단위에서 내는 기부금에 비하면 매우 적은 예산으로 최대 효과를 보려면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재 기획한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향후 여러 후원자가 아동보육기관 종사자 지원에도 동참했으면 좋겠어요.”
나눔에서 ‘삶의 의미’ 찾는 사람들
김정환(37)씨는 딸이 생후 1000일째 되던 날 1000만원을 기부했다. 생애 첫 고액기부였다. 그는 “하루 1만원씩 아이를 위해 기부금을 적립했다고 생각하면 큰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얻은 아이였다. 병원에서는 부부에게 아이 갖기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김씨는 “어릴 때 딸아이가 잠깐 아프기도 했는데, 건강하게 자라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래 아이들을 돕는 위기가정 아동 지원사업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의 글로벌 IT기업에서 기술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기부 당시인 2022년에는 한국지사에 재직했고 지난해 초 본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기부를 결심하는 데 조직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큰 자연재난이나 전쟁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CEO가 전사 메일을 통해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각자 찾아보자는 식이죠. 추수감사절에는 전 직원에게 기부하라고 100달러(약 13만원)씩 주고, 직원들이 기부하면 회사에서 매칭해서 추가 기부를 합니다. 나눔을 경험하라는 취지입니다.”
회사는 매년 최대 1만 달러(약 1300만원) 한도로 직원이 기부한 만큼 매칭 기부금을 내놓는다. 굿네이버스에 1000만원을 기부하면, 회사도 그만큼 기부해 총 2000만원이 전달되는 식이다.
그는 지난해 가족이 이주하면서 은행으로부터 받은 대출금을 갚으면서도 추가 기부 계획을 세웠다. 내년 5월이면 아이가 생후 2000일이 되는데 그에 맞춰 2000만원을 기부할 계획이다. 김씨는 “바쁘게 살다 보면 삶이 공허하다거나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때가 가끔 있는데, 기부가 삶의 방향을 잡는데 좋은 수단이 된다”며 “기부를 계속하려면 열심히 살아야 하고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 무엇보다 크다”고 말했다.
김새순(44)씨 역시 가족의 기념일을 챙기기 위해 시작한 기부를 키워나간 케이스다. 그는 지난 2022년 10월 남편 최진웅(45)씨 생일을 맞아 자립준비청년을 돕는 사업에 1000만원을 기부했다. 그는 “예전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면 그건 남편을 만났기 때문”이라며 “가족의 사랑이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듬해인 2023년 4월에는 남편이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며 미혼모 자립 지원에 1000만원 후원금을 내놨다. 올해도 미혼모 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1000만원을 내놓았다. 최진웅씨는 “가족회의를 통해 미혼모 지원사업에 후원을 결심했다”며 “올해는 세월호 10주기이기도 한데, 사회 안전망 강화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기부의 세계로
미국 땅에서 수억원의 기부금을 굿네이버스에 전달한 최미영(53)씨는 10여 년 전 기부에 발을 들였다.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결정이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노르웨이 기업에 취업했다. 해운회사에서 배를 사고파는 금융 일을 배웠다. 이후 미국에 이민 가서 월가에서 10년. 성공을 좇아 살았다. 투자은행(IB)에서 아시아 담당으로 일할 땐 1년에 330일을 출장 다녔다. 개인 사업을 시작하고도 일과 성공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러다 동갑내기 남편의 죽음을 겪었다. “별거 중이던 남편한테 5년 만에 연락이 왔어요. 말기 암이라네요. 그러고 40일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그때 처음 멈췄던 것 같아요. 죽음이 오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작한 기부는 정기후원에서 사업 후원으로 키워갔다. 지금까지 2억원이 훌쩍 넘는 돈을 기부했다. 아프리카 말라위에 우물을 만들고, 학교도 짓고, 도서관도 세웠다. 그는 “천장이 없는 학교 교실에 신발도 없이 맨발로 등교해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며 “공부하러 온다기보다 밥 먹으러 학교에 온다는 아이들 말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의미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어요. 조금 더 성공한다 한들 허무함에 빠지면 소용이 없죠. 기부를 통해 작은 제 삶이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또 아이들도 자신들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기적 같은 일이에요. 사업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올해 3월에는 말라위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을 엮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Love Letter, Children of Malawi(말라위 아이들에게서 온 러브레터)』를 발간했다. 10년 전 출간한 동명 그림책의 영문본이다. 최씨는 “아이들 아빠를 잃고 방황하던 때에 제 마음을 잡아주었던 지금의 남편이 출판과 제작을 도와줘서 함께 작업했다”며 “혹시 사업이 어려워지더라도 아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판매 수익금은 말라위 아이들에게 지속해서 기부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오래 지내면서 느낀 건 기부문화가 자산가나 기업 위주라는 점이에요. 일반 시민의 자발적인 기부는 한국이 오히려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부할까 하는 마음이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결국 기부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작게라도 시작하면 알게 됩니다. 새로운 차원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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