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일주일 만에 64조 날렸다…떡볶이 즐기던 월가 '새끼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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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손실을 기록한 사건. 단 1주일 만에 166년 역사의 스위스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를 사라지게 한 사건. 월가의 ‘천재 투자자’가 단 몇 개의 주식에 돈을 걸어 하루 아침에 파산한 사건.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됐지만 정작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은 한국계 투자자 빌 황(한국명 황성국·60)의 ‘아케고스 사태’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빌 황에게 1심 판결로 징역 18년 형을 선고했다. 지난 5월 재판이 시작된 지 6개월 만이다.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재판장에 선 황 씨는 뒤를 돌아 배우자를 바라봤을 뿐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케고스캐피털(Archegos)은 2013년 황 씨가 설립한 개인 투자회사로 가족과 지인의 자금을 운용했다. 그는 추가 수익을 내기 위해 보유한 주식을 담보로 은행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수익스와프(TRS) 등 복잡한 파생상품을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투자한 주식들이 폭락하자 돈을 돌려주지 못하고 파산했다. 날려버린 본인 재산만 360억 달러(약 50조6000억원). 황 씨에게 돈을 빌려준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노무라·CS 등 투자은행들이 총 100억 달러(약 14조원)의 손실을 입었는데, 이 모든 일이 단 1주일 만에 일어났다. 월가는 충격에 빠졌고, 무려 55억 달러를 잃은 CS는 일어서지 못하고 UBS에 합병됐다.
‘사기인가 사고인가’. 검찰이 2022년 4월 황씨를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한 이후 법적 다툼은 이어지고 있다.
황 씨는 월가의 주류와 여러모로 달랐다. 1982년 겨울, 18살의 나이로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황 씨의 어머니는 한인이 많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해 멕시코 사람들을 상대로 생필품을 팔며 두 아들과 딸 셋을 뒷바라지했다. 황 씨는 가난 속에서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에 진학해 경제학을 공부하고 카네기멜런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졸업했다. 당시 동양인에겐 높았던 월가의 문턱을 넘기 위해 1990년 현대증권 뉴욕법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월가 헤지펀드의 전설로 불리는 줄리언 로버트슨(Julian Robertson)이 설립한 타이거 매니지먼트에 스카우트됐다.
타이거의 훈련 과정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호랑이는 사자와 달리 혼자 사냥한다. 미세한 소리와 냄새, 작은 기척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다가 단번에 먹잇감을 덮쳐버린다. 그런 호랑이처럼 철저한 준비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게 타이거 펀드의 특징이다. 이를 위해 단순히 월가나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에 의지하지 않고 외부에서 정보를 찾아 분석해 가치를 더하는 ‘가치부가 분석(Value-Added Research)’ 전략을 쓴다. 황 씨도 나이키에 투자할 때 미국은 물론 한국 협력사, 유통업체, 소비자까지 일일이 만나 정보를 모으곤 했다.
월가에선 줄리언에게 투자를 배우고 함께 일한 펀드 매니저들을 ‘타이거 컵스(Tiger Cubs, 새끼 호랑이들)’, 그 타이거 컵스들이 만든 펀드에서 훈련받은 매니저들을 ‘타이거 그랜드 컵스(Tiger Grand Cubs, 손자 호랑이들)’라고 부른다. 한때 전 세계 롱숏 헤지펀드의 약 3분의 1을 타이거 컵스와 그 자손들이 굴렸다.
황 씨는 타이거 컵스 중에서도 수제자였다. 줄리언이 직접 자금을 지원해 황 씨에게 ‘타이거 아시아 매니지먼트’를 맡겼고 월가를 대표하는 아시아 전문 펀드로 성장했다.
타이거에서 독립해 아케고스를 설립한 황 씨는 지금까지 그랬듯 먹잇감으로 낙점한 주식에 공격적으로 투자했고 수년간 우수한 성과를 냈다. 아케고스의 자문을 맡았던 A씨에 따르면 황 씨는 코로나19가 터지자 ‘콘텐트는 많은데 제대로 스트리밍(전송 및 재생)을 못하는 기업들이 제2의 넷플릭스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트럼프 1기 정부에서 미중 갈등으로 저평가된 중국 기업들이 2021년 바이든 정부 출범으로 미중 관계가 개선되면 재평가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런 판단 아래 아케고스는 미국의 미디어 기업인 비아콤CBS와 디스커버리, 중국의 바이두와 텐센트뮤직, 담배회사 RLX테크놀로지, 교육기업 GSX테크에듀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2021년 3월,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던 비아콤CBS는 30억 달러(약 4조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하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디스커버리는 유명 증권사가 투자의견을 중립에서 매도로 내리면서 급락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예상을 깨고 취임 초반부터 중국을 견제했으며 이에 중국 정부가 강대강으로 맞서며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했고 중국 주식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아케고스가 자금을 빌려 투자한 주식이 일제히 급락하자 황 씨에게 투자한 은행들은 추가 증거금을 요구하는 이른바 ‘마진콜’을 발동했고, 급기야 장중에 반대매매된 아케고스 주식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아케고스는 결국 파산을 선언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악재가 한꺼번에 터져 한화로 무려 70조원 가까운 돈이 증발한 것이다.
황 씨 측 변호인은 사기 목적이나 주가조작 혐의를 부인하면서 “그(황 씨)는 자신의 투자에 용기와 신념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해당 주식의 가치를 믿고 거액을 투자했다는 얘기다. 검찰은 “황 씨가 위험을 감수한 건 더 많은 돈과 성공, 권력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변호인은 “황 씨는 월가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에도 뉴저지주 소형주택에서 검소하게 살아왔고, 자선재단에 기부를 많이 해왔다”고 반박했다.
실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황 씨는 10년이 넘은 볼보 자가용을 몰며 한국에 왔을 때도 떡볶이나 순대를 즐겨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은 지인이 ‘그 정도 큰돈을 벌면 좀 쓰면서 사시라’고 하자 황 씨는 “(투자해서 번 돈은)내 돈이 아니다. 함부로 막 쓰지 않는다. 좋은 회사에 투자해서 그 회사가 보상을 받게 하는 게 좋은 자본가이고, 번 돈은 자선사업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황 씨는 1심 선고가 내려진 직후에도 지인에게 “계속해서 (자선) 재단의 공동체 성경 읽기 모임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해 (항소 절차를 통해) 싸워 가려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타이거 매니지먼트에는 1990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투자분석 목록’이 있다. 이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리스크는 무엇이며, 그 기업이 이런 리스크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가 ▶그 기업에 대한 투자를 재앙으로 만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 요인이 발생하면 얼마나 심각할 것인가를 따지는 항목이 있다. 황 씨와 교류해 온 한 투자업계 대표는 “결국 투자는 절대로 안 일어날 것 같은 변수나 리스크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라며 “황 사장은 많은 분석을 하고 판단에 확신을 가졌겠지만 위기관리를 거기까지는 못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블룸버그통신은 21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심리에서 황 씨의 변호인이 판사에게 황 씨의 연령 등을 이유로 들어 징역 18년 중 6년 6개월을 가택연금으로 복역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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