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당신들이 네번째 조문객"…'살아있는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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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진주 와인바 사건의 장소에서 김언희(가운데 뒷모습시인)과 후배시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 시인은 자신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위성욱 기자

지난 23일 오후 3시 경남 진주 경상대학교 인근 와인바 사건의 장소에서 ‘살아 있는 장례식’이 열렸다.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뒤『트렁크』라는 파격적인 시집을 내놓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김언희 시인이 성윤석·조말선 등 후배 시인들 몇 명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연락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후배 시인들은 갑작스러운 연락에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일흔이 넘은 김 시인이 최근 의사로부터 ‘심장 박동기’를 달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취지의 경고를 받았지만 그런 순간이 오면 ‘그냥 죽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터라 혹시 건강이 더 나빠진 건가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김 시인은 온화한 걸음걸이로 지하에 있는 와인바에 나타났다. 그는 “시도 다 썼고, 그동안 챙겨주지 못했던 후배들과 ‘살아 있는 장례’를 미리 치르고 싶었다”며 “오늘이 4번째 자리다”고 말했다. 후배시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4번째 조문객 자격으로 초대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앞서 김 시인은 현대 미술계 굴지의 명소로 꼽히는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간판 전시장 터바인홀에서 한국 국적 작가로는 최초로 단독 전시를 했던 이미래 설치미술 작가에게 저작권료 형태로 1000만원을 받았다. 이를 새 시집 출간을 겸해 ‘살아 있는 장례식’ 형태로 후배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데 쓰기로 한 것이다.

김 시인은 평소 함께 시모임을 하는 후배들에게 “예술가는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예술가로 죽고, 한 번은 인간으로 죽는다. 나는 먼저 시인으로 죽을 거다. 그다음에 인간으로 죽겠다. 나는 두 개의 삶을 살았고, 두 개의 죽음을 죽을 거다”고 말했다. 또 “(죽어도) 장례식 같은 것은 하기 싫다”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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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시집 호랑말코 표지. 사진 문학과지성사

특히 김 시인은 최근 7번째 시집인 『호랑말코』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610번으로 출간했다. 그는 “1년 9개월간 (나이 들어 시를 쓰느라) 죽을 것 같았다”라며 “돌이켜 보면 내가 산 삶이 시로 쓰였지만, 시가 먼저 산 삶을 내가 뒤따라 간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트렁크에서 호랑말코에 이르기까지 7권의 시집에서 그는 적나라한 성적 표현 등을 뒤섞어 그로테스크한 김언희 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김언희 시는) 이전의 여성 시 대부분을 내숭으로 만들었고, 이후의 여성 시 상당수를 아류로 만들어버렸다.”(신형철 문학평론가), “김언희 이전에 김언희가 없었고, 김언희 이후에 김언희가 없었다.” (문학평론가 송희복) 등의 평가가 뒤따르는 이유다.

제멋대로인 사람을 가리키는 『호랑말코』 시집에도 시인 특유의 적나라한 성적 표현과 비속어 혹은 자극적 이미지의 단어들로 표현된 50여 편의 시가 담겨 있다. 경상대학교 외국어교육과를 교사로 일해온 그는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되자 전업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부터 매일 자신이 정한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오로지 시만 쓰며 살았다고 했다. 간혹 일탈이 있었다면 자신을 찾아온 후배들과 한 달에 한 번 정기 시 모임을 하는 정도였다. 지난해 제5회 박상륭상을 받은 김한규 시인 등 그와 모임을 함께 했거나, 하고 있는 후배들은 문단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이날 말수가 적었던 평소와 달리 와인도 마시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뒤따르는 후배들을 한 명씩 따뜻하게 안아줬다. 후배들이 준 꽃다발은 두고 편지만 품에 챙겨 갔다. 그러면서 『미친, 사랑의 노래』(현실문화)를 한 권씩 건넸다. 이 책은 기존의 비평 언어로는 온전히 포착할 수 없었던 시인 김언희의 세계를 여성, 작가, 퀴어의 눈을 통해 재해석하고 전유하는 이른바 ‘유사 비평’의 실험을 담고 있다. 김언희 시인의 시 세계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조명한 대담도 들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오직 시 쓰기에도)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시인으로도 인간으로도 마지막 작별인사가 되지 않기를 후배 시인들은 바랐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놓여 있던 『호랑말코』 시집은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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