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암소야 고생했어” 도축 대신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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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11시30분 전남 장흥군 대덕읍 월정리 ‘풀로만목장’. “목초(牧草)만 먹여 소를 키운다”는 목장 안에서 요들송이 울려 퍼졌다. 이날 은퇴하는 암소 3마리를 위해 조영현(70) 풀로만목장 대표 부부가 부르는 축가였다.
조 대표는 “13년 전 귀농할 때 산 암송아지 12마리 중 3마리가 더는 임신이 되지 않아 은퇴식을 갖게 됐다”며 “그간 많은 송아지를 낳아준 소들이 친구·자식들과 어울리며 목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은퇴한 주인공은 다롱이, 구피, 똑순이 등 암소 3마리다. 서울 토박이인 조 대표는 2011년 11월 장흥으로 귀농하면서 구입한 암송아지 12마리를 “창립멤버”라고 부른다. 남아 있는 5마리의 창립멤버 중 3마리가 더는 임신이 되지 않아 은퇴하게 됐다.
조 대표는 “풀로만목장을 위해 큰일을 했던 소들에게 신세를 갚으려 한다”며 “은퇴한 소들은 그동안 경제동물로 일해 오다 반려동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늙은 한우를 위한 은퇴식은 이례적이다. 새끼를 낳지 못하게 된 암소는 보통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대신 이날 은퇴한 소들은 초원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한강 작가의 부친인 한승원 작가는 “한우 은퇴식을 하겠다”는 조 대표의 말에 “희한한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풀로만목장은 한 작가의 장편소설 『사람의 길』에도 소개됐다. 한 작가의 최신작인 소설 232쪽부터 10쪽에 걸쳐 목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작가는 소설에서 풀로만목장에 대해 ‘축생지옥을 사는 소들을 잘 먹여 천국으로 보내는 보살행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썼다.
이날 한우 은퇴식에서는 한 작가의 작은 사인회도 열렸다. 한 작가는 자신의 소설 『사람의 길』 30권을 준비해 행사 참석자들에게 건넨 후 “나도 은퇴하는 소들을 절반 정도 후원하겠다”며 조 대표에게 봉투를 건넸다. 한 작가는 자신이 머무르며 작품 활동 중인 장흥 지역의 한 문인을 통해 조 대표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한우 은퇴식을 전후로 후원자들도 생겼다. 조 대표의 지인인 정철승 변호사와 무영스님 등이다. 이들은 “다롱이와 구피 여생의 풀값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그간 후원자가 없었던 똑순이도 이날 은퇴식 직전 후원자가 나타났다.
풀로만목장은 축사와 풀밭 등 2만8000여 평(9만3000㎡)에서 160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다. “사람은 사람답게, 소는 소답게”라는 조 대표의 소신에 따라 최상급 동물복지 환경을 조성했다. 옥수수 등 곡물을 먹여 마블링을 키우는 대부분의 농가와는 달리 목초만 먹여 소를 키운다. 조 대표는 20년 넘게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목초 등을 무역해 온 사료 전문가다.
그가 사료 무역을 위해 국내외를 오가다 눈에 들어온 곳이 장흥군이다. 장흥은 9월 말 기준 한우 사육두수가 5만8000여 마리로 주민등록 인구(3만4594명)보다 많다. 한우 사육에 적합한 자연여건을 갖춰 한우와 키조개, 표고버섯이 어우러진 ‘장흥삼합’이 탄생하기도 했다.
조 대표는 “자연의 이치에 맞게 소를 키워 판 지 11년이 됐다”며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임에도 제 생각에 동의해 주시는 분들이 찾아서 구매해 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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