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조선인 희생자 추도사는 빼고서…"기쁘다, 감사하다"는 일본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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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9시경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佐渡)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산길에 백발에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들, 이 분들을 부축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도광산 조선인 희생자의 유가족들이다.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머문 ‘제4소아이(相愛)’ 기숙사 터. 잡초가 무성한 곳에 설치된 천막엔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이란 현수막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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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 기숙사인 제4소아이(相愛) 터에서 사도광산 유족과 박철희 주일 한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 측만의 별도 추도식이 열렸다. 유족들은 이날 개별적으로 추도 시간을 가진 뒤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동원된 가족들이 일했던 사도광산을 방문했다. 사도=김현예 특파원

“80여년 전 사도광산에 강제로 동원돼 가혹한 노동에 지쳐 스러져간 한국인 노동자분들의 영령에 머리 숙여 깊은 애도를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박철희 주일 한국대사가 유가족 9명 등 30명이 모인 가운데 추모사를 읽기 시작하자 앞줄에 서 있던 한 유족이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10여분 만에 행사가 끝나자 희생자 유족들은 하나둘 나와 위패 앞에 절을 하고 술을 올렸다. 허탈한 표정으로 산길을 내려온 이들은 사도광산으로 향했다. 관광지로 변한 광산 갱도를 둘려본 고령의 한 유족은 “아버지 이름도 어딘가 적혀 있는 곳이 있을 텐데”라며 안내 패널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3박 4일, 난생 처음 가족의 흔적을 찾아 사도섬을 방문했던 유족들의 일정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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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유가족이 25일 오전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소재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제4소아이(相愛)터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사도섬에서 기자가 1박 2일간 마주한 ‘한국 따로 일본 따로’ 추도식 현장은 극명히 갈렸다.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일본 주도의 추도식 현장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지난 24일 사도섬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일본 추도식엔 대체 누구를 추도한다는 것인지조차 표시돼 있지 않았다. 행사 1시간 전에서야 공개된 식순 안내지엔 '추모사'란 말 대신 ‘인사말’이란 단어가 적혀있었다. 추도사 없는 추도식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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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에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이 참석했다. 이쿠이나 정무관은 취재진을 피해 별도 쪽문으로 행사를 마친 뒤 이동했다. 사도=도쿄특파원 공동취재단

사도시장과 니가타현지사, 추도식 실행위원장의 발언은 더했다. 에도시대부터 이어져온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도록 애쓴 이들에 대한 ‘감사’가 중심이었다. 나카노 고 실행위원장은 “사도광산에 관여한 모든 분에게 광산이 세계의 보배로 인정받았음을 보고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광산에서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의 활약 덕분”이란 말도 보탰다. 추도식에 감사란 발언이 적절한가를 묻는 질문엔 외려 “여기는 일본”이란 답이 돌아왔다.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쿠이나 아키코(生稲晃子) 외무성 정무관의 태도도 문제였다. 한국 정부 측 인사와 유족이 불참했는데도 그는 취재진을 피하려는 듯 ‘뒷문’ 입장을 택했다. 고위직인 차관급 행보로는 볼썽사나운 일이었다.

사전에 마련해온 ‘인사말’도 부적절했다. 약 1500명으로 추산되는 강제동원 조선인에 대한 사죄나 반성은 없었다.“종전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감스럽지만 돌아가신 분들이 있다”거나 “애도한다”는 수준에 그쳤다. 헌화를 마친 그는 또 다시 뒷문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갔고, 외무성은 뒷문 바로 앞에 차를 댔다.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이 사실상 취재진을 피해 도망치는 모양새를 선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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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이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 갱도를 찾아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뉴스1

일본 정부나 일본 언론은 한국 정부가 추모식 불참을 선언한 이유가 이쿠이나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 때문이라고 보는 모양새다. 하지만 틀렸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전시실 마련과 추도식을 약속한 건 바로 일본이다. 그리고 강제동원된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식은 추도식 다웠어야 했다.

희생자 유족들이 어렵사리 사도섬까지 찾아온 건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도광산의 자랑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들의 발걸음은 일본을 찾는 여느 외국인 관광객의 발걸음과는 무게가 전혀 다르다. “(부모님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게 한”이 됐다는 유족에게 일본은 진정으로 이들의 면전에 “감사하다”라고 말할 생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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