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은행에 또 손 벌린 정부 "소상공인 지원 위해 1.8조 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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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은행들에 취약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거액의 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내수 부진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는 가운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는 은행에 도움을 또 구한 것이다. 당장 쓸 재정·금융 지원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고려됐다. 어려운 소상공인을 돕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분석도 있지만, 내수 부진을 결국 관치로 해결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당국 요청에…은행권 지난해 수준 자금 출연 논의
29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은행연합회는 시중은행 관계자들과 함께 대규모 사회 공헌을 위한 논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는 은행연합회 주도로 자발적으로 이뤄졌지만, 그에 앞서 사회 공헌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금융당국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장 관심을 끈 지원 금액은 일단 지난해와 유사한 수준으로 맞춰질 전망이다. 지난해에는 은행연합회 20개 사원 은행 중 국책은행인 산업·수출입은행을 제외한 18개 은행이 약 2조원의 사회 공헌 자금을 마련했다. 재원 부담은 은행별 지난해 당기순이익 기준으로 나눴다. 이익을 많이 낸 은행이 더 내는 방식이었다. 총 2조원의 재원 중 1조6000억원을 개인사업자 187만명의 이자를 환급하는 데 썼고, 기타 취약층에는 4000억원을 지원했다.
올해 지원 금액도 지난해와 유사한 2조원 안팎에서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 내부에서는 시중은행들이 분담해 약 1조8000억원가량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아직 확정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은행권 논의 과정에서 더 늘거나 줄어들 수 있다. 분담 자금을 은행들이 지난해처럼 당기순이익 기준으로 나눌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취약 소상공인 ‘선별 지원’에 초점
지원 대상은 이번에도 취약 소상공인에 맞춰진다. 내수 부진의 가장 큰 타격이 자영업자 등 소상공인에 집중돼 있어서다. 단순히 돈을 뿌리는 것이 아닌, 정말 어려운 경제 취약층을 선별 지원해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취지다.
지원 방식은 주로 이자 환급에 지원 내용이 맞춰졌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채무 조정 같은 다른 방식도 고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은행들이 분담하기로 한 자금 범위 내에서 고객들에게 직접 이자를 환급해 주는 방식을 취했지만, 올해는 ‘취약 소상공인 지원 자금’을 은행들이 함께 모아 다양한 방식에 쓰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내수 부진 늪에 은행권 ‘SOS’ 또 요청
지난해 ‘일회성’으로 기획됐던 은행들의 대규모 사회 공헌이 올해 또 추진되는 것은 경기 침체를 타파하기 위한 정부의 고육책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내수 부진 상황은 이미 한계점에 달했다. 대표적 내수 판단 지표인 소매판매지수는 올해 3분기 전년 동기 대비 1.9% 감소하면서 2022년 2분기(-0.2%) 이후 10분기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1995년 1분기 이후 최장 기간 마이너스 행진이다. 내수 부진 여파에 2분기 경제성장률은 0.2% 역성장한 데 이어 3분기에는 0.1% 성장하는 데 그쳤다. 실제 주요 기관들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대 중반에서 2% 초반으로 줄하향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28일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에서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올해는 2.4→2.2%로, 내년은 2.1→1.9%로 하향 조정했다.
특히 최일선에서 내수 경기를 체감하는 소상공인의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벼랑 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곳 이상에서 빚을 진 다중채무 자영업자의 대출 잔액은 지난 2분기 753조8000억원으로 1년 새 9조9000억원이 급증했다. 역대 2분기 기준 가장 많다. 같은 기간 이들의 연체액(13조9000억원)과 연체율(1.85%)도 역시 2분기 기준 최대다.
경기 부진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가운데 정부가 쓸 수 있는 지원책도 마땅치 않다. 세수 부족으로 대규모 재정 부양책을 쓰기도 어렵고, 부동산 가격과 환율 불안에 기준금리를 빠르게 낮추기도 힘들어서다. 결국 정부가 민간 기업인 은행에 손을 벌리는 상황에 또 몰린 것이다.
“은행 사회공헌 압박, 경영 자율 침해”
다만 정부가 이런 방식으로 금융사에 자금 출연을 압박하는 것은 지나친 관치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고금리 효과에 은행들이 올해도 사상 최대 이익을 거두고 있지만, 이익을 많이 냈다고 사회 공헌을 요청하는 일이 반복되면, 경영 자율성이 침해받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의 이익을 주주들에게 환원해 기업 가치를 높이겠다는 금융당국의 ‘밸류업 정책’ 취지와도 모순된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익이 났다고 해서 은행들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례가 반복되면, 경영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투자자 이익도 훼손하게 된다”며 “다만 최근 내수 부진이 심각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는데, 지원금은 정말 필요한 곳에 제한적으로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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