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빈 눈밭, 빈 눈빛…안중근으로만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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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장군을 연기한 현빈은 “하얼빈 거사가 있고 36년 후에야 나라를 되찾았다”면서 “절대 쉽게 찍을 수 없다는 각오로 진심을 다했다”고 말했다. [사진 CJ ENM ]

“꼬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기차역,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암살됐다. 러시아군이 주둔한 현장에서 총격과 함께 러시아어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이는 당시 갓 서른의 안중근(1879~1910) 대한의군 참모중장. 배우 현빈(42·사진)의 신작 ‘하얼빈’(24일 개봉)은 바로 이 장면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다.

‘내부자들’(2015) ‘남산의 부장들’(2020) 등 한국 현대사의 비판적 해부도를 스크린에 새겨온 우민호 감독이 안중근 장군과 독립투사들의 의거를 만주 대자연 속에 장엄한 회화처럼 그려냈다. 이국땅에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결의로 뭉친 독립투사들의 고독한 심리적 풍경화에 가깝다. 순제작비 265억원(손익분기점 650만 관객)의 상업 대작으론 드문 미학적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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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안중근 장군의 존재감과 상징성” 탓에 주연 제안을 거절한 현빈도 “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며 어느 순간 궁금해졌”단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연기자로서 이렇게 훌륭한 인물을 연기할 기회가 또 올까 싶었다”고 돌아봤다.

아내인 배우 손예진과 결혼 계기가 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2020, tvN) 등 일본에서도 인기 있는 한류스타 현빈의 항일영화 출연은 의외로 비칠지 모른다. 정작 본인은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 배우 데뷔 전 경찰대 진학을 꿈꿨고, 전성기였던 2011년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그는 안중근 장군의 “군인으로서 신념”에 깊이 매료된 듯 보였다.

“서른이란 나이에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 하고 운을 뗀 그는 어린 삼남매를 둔 ‘아버지’ 안중근의 용단도 남다르게 봤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보니 더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면서다. 현빈은 ‘하얼빈’ 촬영이 시작됐던 2022년 11월 첫아들을 얻었다.

‘하얼빈’ 속 인물 묘사는 극도로 건조하다. 독립군 중 밀정의 정체를 찾는 과정이 서스펜스를 불어넣는 정도다. 극 초반 신아산 전투신, 하얼빈역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속 공간 대부분이 흡사 연극 무대처럼 인적 없이 비어있다. 가장 중요한 하얼빈역 장면도 클로즈업이 아니라 부감(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쇼트)으로 표현됐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극도의 절제 속에 우 감독이 의지한 건 현빈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서 그는 “쓸쓸함과 연약함, 강함”을 읽어냈다.

온 국민이 아는 영웅을 연기하는 건 배우에게 상상을 뛰어넘는 압박이었다. 현빈은 “매일 같이 관련 책과 자료들, 기념관에 가서 그분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상상했다”고 했다. 사형대에 오르는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나선 갑자기 터진 오열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동안 계속됐어요. 터졌다가, 사그라졌다가…, 하루 종일 반복했죠. 어깨 위에 있던 뭔가가 훅 떨어지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얼어붙은 대동강 장면, 거미줄처럼 실금이 얽힌 강 표면을 고행하는 순교자처럼 홀로 걷는 안중근 장군의 모습은 실제 상황이 아닌 그의 결연한 내면을 형상화했다. 이 영화의 주제나 다름없는 이미지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16시간 떨어진 홉스골 호수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영하 40도 강추위 속에 진행됐다. 현빈은 “발밑으로 두꺼운 얼음 깊은 곳이 깨졌다가, 붙었다가 하는 소리가 났다”며 “무섭고, 외롭고,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그게 좋았다”고 했다. 광주에서 신아산 전투신을 찍을 땐 예기치 못한 폭설로 눈 밭을 뒹굴었지만, “정신적 압박이 셌던 상황이라 신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못했을 정도”였다.

영화 후반 “불빛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그의 내레이션은 실제 안중근 장군의 말을 인용해 만든 것. 극 중 이토 히로부미가 “이 나라 백성들은 국난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 대사와 함께 비상계엄 시국을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하얼빈’ 언론시사 후 간담회에서 “힘을 모아 한 발 한 발 내디디면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시국 암시 발언을 한 현빈은 19일 “아이를 생각하면 더 나은 미래가 와야 하고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라면 ‘하얼빈’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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