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31일 개봉)는 정치 양극화한 미국을 무대로 가상 내전 상황을 그려낸다. 사진 마인드마크

대통령 선거를 치른 올해 미국에선 두 편의 영화가 논란을 불렀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사업가 시절 치부를 드러낸 ‘어프렌티스’(감독 알리 압바시)와 가상의 미국 내전 상황을 그린 ‘시빌 워: 분열의 시대’(감독 알렉스 가랜드)다. ‘어프렌티스’가 지난 10월 한국 개봉했고, 이어 ‘시빌 워’는 오는 31일 개봉한다.

두 작품 다 독특한 호러‧판타지 스타일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외국인 감독이 미국 자본을 투자받아 연출했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공통점. 모두 ‘트럼프 저격 영화’로 알려졌지만, 대선 당락에 결정적 영향은 못 미쳤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31일 개봉)의 한 장면. 각본을 겸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분노와 걱정이 혼재된 상태에서 이 작품을 썼다. 이후의 영화 제작 기간까지 시간이 길었지만, 대본을 쓸 때 느꼈던 당혹감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커졌다”라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 사진 마인드마크

특히 영국 감독 알렉스 가랜드는 ‘시빌 워’에서 정치색이 반대인 텍사스주‧캘리포니아주가 연합해 미국 대통령에 맞선다는 설정 자체부터 “미국 현실 정치에 무지하다고 비판 받았”(벌처)다. 보수 텃밭과 진보 우세 지역이 손잡을 만큼 대통령이 저지른 심각한 잘못이 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 탓에 “소재로 관심 끌려는 떠들썩한 영화”(뉴요커) “논쟁이나 경고라기엔 너무 단순하다”(디사이더)는 현지 평가도 나왔다. 가랜드 감독은 “질문거리를 던지기 위해서”라 항변했지만, 여론을 뒤집진 못했다. 인공지능(AI) SF ‘엑스 마키나’(2015), 남성성의 유독성을 극대화한 공포영화 ‘멘’(2022) 등 전작의 명성을 충족하지 못했단 평가다.

그럼에도 ‘시빌 워’는 올 4월 먼저 선보인 미국에서 소재 자체로 화제를 모았다. 할리우드 신흥 예술영화 명가 A24(‘미나리’, ‘성난 사람들’ 제작) 작품 최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개봉 2주 만에 제작비 5000만 달러(약 727억원)를 회수했다. 2021년 초 트럼프 대통령의 연임 실패에 반발한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을 무력 점거하는 등 양극화한 미국 정치 상황을 실전 같은 전시 액션에 실감나게 녹여낸 점도 흥행에 한 몫 했다. 기술 고문을 맡은 17년 경력 해군특전단 레이 멘도사가 전직 미 해군 동료들과 직접 참여해 리얼리티를 높였다.

한국에선 개봉이 11월에서 12월로 밀리며 뜻밖에 12‧3 비상계엄 시국 영화로 재해석되는 추세다. 정치 갈등에 무장 군대가 동원되며, 환율 폭락, 물 부족 등 일상 근간이 붕괴하는 장면에서다. “우리도 미국인”이라는 기자들에게 총구를 들이댄 군인은 “어느 쪽 미국인”이냐고 무심히 되묻는다. 출신지역이 생사를 결정짓고, 평화롭던 동네가 시민들의 무덤이 된 풍경도 아찔하다. 전쟁이 장기화하며 죽지 않기 위해 죽이는 목적 없는 살상마저 벌어진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31일 개봉)에선 대통령이 정치적 분열을 초래한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대국민 담화에만 골몰한 대통령의 모습을 전시한다. 사진 마인드마크

그런 와중에 대통령은 백악관에 숨어 대국민 담화를 연습·방송하는 모습만 묘사된다. 대통령은 정부군의 압승을 근거 없이 주장하며, 이를 신(神)과 건국이념의 승리로 포장한다.

영화의 중심축은 이런 대통령 특종 인터뷰를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는 4명의 종군기자다.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리(커스틴 던스트)는 동료 조엘(와그너 모라), 기자 지망생 제시(케일리 스패니), 뉴욕타임스 노기자 새미(스티븐 헨더슨)와 함께 포화 속을 뚫는다. 극 중 “워싱턴에선 기자들을 현장에서 사살한다. 우릴 적으로 본다”는 새미의 대사는 가랜드 감독의 세태 풍자가 담긴 것. 미국 매체 ‘벌처’ 인터뷰에서 그는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소셜미디어는 방대한 소음과 뉴스에 대한 반박, 모든 정보에 대해 일종의 정적(政敵)을 만드는 이론을 만들어낸다”고 풀이했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31일 개봉)는 대통령 및 워싱턴 권력이 적대시한다고 묘사되는 언론의 모습을 통해 "정치인들이 의도적으로 신뢰성을 훼손해온 미디어 현실"(알렉스 가랜드 감독)을 그려낸다. 사진 마인드마크

시사회로 미리 관람한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은 “이 영화는 무섭다 못해 섬뜩하다. 아마도 현실 세계가 전쟁과 갈등으로 들끓기 때문”이라고, ‘1987’ 장준환 감독은 “전쟁 영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시도가 신선하다”고 관람평을 남겼다.

벌어져선 안 될 최악의 현실을 대체 역사 장르로 거울처럼 비춰 보여주는 영화다. 액션 요소가 강한 ‘시빌 워’는 “트럼프에 대한 기존 풍자 내용을 복사한 작품”(가디언)이란 박한 평가와 함께 트럼프 측근의 개봉 방해에 시달린 ‘어프렌티스’에 비해 흥행은 순조로운 편. 박스오피스 분석 사이트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23일까지 ‘시빌 워’의 전세계 흥행 수입은 1억 2618만달러(약 1834억원)로, ‘어프렌티스’의 1727만달러(약 251억원)를 크게 앞질렀다.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