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10곳 중에 3곳 수출 타격"…계엄 한 달, 중소기업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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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기계 제조업체 A사는 최근 환율과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에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핵심 부품을 독일·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비용 부담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어서다. 연매출 2000억원 이상 기업으로 성장하며 장기간 거래해 온 해외 업체들의 태도도 돌변했다. 이들은 한국의 정치 혼란을 문제 삼으며, 통상 180일 이후 지급하던 수입품 구입 대금을 30일 안에 결제해 달라고 최근 요청한 것이다.
A사 관계자는 “그동안 문제없이 외상거래를 해 온 셀러들이 갑자기 대금 결제 기간을 5개월이나 당겨서 초비상이 걸렸다”며 “완제품을 수출해 번 돈으로 수입 부품 대금을 결제해야 하는데, 돈이 돌지 않으니 자금난이 더 심해질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엄·탄핵 정국이 한 달 이상 이어지며 기업들이 흔들리고 있다. 중앙일보가 9일 한국무역협회를 통해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확인해 보니 자금 부담 확대, 계약 무산 등 피해가 잇따랐다. 재계는 경기 하강 국면에서 경제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는 상황은 기업들에 치명적이라고 호소한다.
연매출 5000억원 이상 규모의 경기도 소재 반도체 장비업체 B사는 계엄 여파로 400만 달러(약 58억원) 규모의 신규 수출 계약이 무산될 위기다. 장기간 접촉해 온 독일 바이어가 지난달 계약 직전 공장 실사를 위해 방한하려던 일정이 취소돼 최종 사인을 하지 못했다. 계엄과 탄핵이 이어지는 한국 상황이 불안하다며 방문을 취소한 것이다. B사 관계자는 “계약이 마무리돼야 양산 일정을 확정하고 원자재를 수급하는 등 후속 조치를 할 수 있는데, 당분간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어 사업에 큰 타격을 입게 생겼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경북에 있는 자동차부품 제조 중소기업 C사 역시 수출 계약을 진행하던 인도 및 일본 완성차 업체가 최근 한국의 제조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협상을 잠정 보류하자고 통보해 왔다. 납기를 제때 맞출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이유였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수출 중소기업 513곳을 조사한 결과 26.3%가 국내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 주요 피해 사례는 ‘계약 지연, 감소 및 취소’(47.4%), ‘해외 바이어 문의 전화 증가’(23.7%), ‘수·발주 지연, 감소 및 취소’(23%) 등이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한 소재 대기업 관계자는 “수십억~수백억원짜리 장기 공급 계약을 위한 미팅이 줄줄이 취소돼 수년 뒤 매출에 타격이 예상된다”며 “해외 고객사에는 일본·중국 등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불확실성이 큰 한국 기업을 고집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기업은 또 해외 기업과 진행하는 인수합병(M&A) 논의가 ‘올스톱’될까 우려한다. 한 화학업체 관계자는 “최근 중국의 저가 공세가 심해 화학업계 구조조정이 시급한데, 탄핵 정국 때문에 해외 기업과의 M&A 논의가 중단돼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환율 충격에 대출 문까지 좁아져…기업들 “하루하루가 불안”
환율 상승도 치명적이다. 대기업 가운데 올해 사업계획 수립 시 현재 수준인 1450~1500원 범위로 원-달러 환율을 예측하고 적용한 기업은 10곳 중 1곳(11.1%)에 불과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국내 5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이들이 적용한 원-달러 환율은 1350~1400원이 33.3%로 가장 많았고, 1300~1350원이 29.6%로 뒤를 이었다. 환율 충격을 줄이기 위해 사업계획을 다시 짜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환율 상승이 자본 유출과 대외신인도 하락 등 ‘눈덩이 효과’로 확대되지 않도록 외환시장 안정화와 기업 유동성 지원 확대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불안정한 정국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자랑해 왔던 안정적인 생산과 납기 준수 같은 신뢰가 의심받고 있다”며 “원자재 가격 급등과 더불어 수출 계약 조건이 나빠져 채산성이 낮아지면 기업들이 자금난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금리와 치솟는 환율(원화가치는 하락)은 특히 중소기업의 어깨를 더 짓누른다. 5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신용대출 금리(신규 취급액 평균금리)는 지난달 공시 기준 연 5.16~6.26%다. 한국은행의 두 차례 기준금리 인하 직전인 지난해 9월 말(연 5.11~6.06%)에 비해 오히려 최대 0.2%포인트 상승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경우(6등급 이하)엔 대출금리가 연 12%를 넘는 곳도 있다.
지난해 말 은행권이 건전성 관리를 강화하면서 대출 문이 좁아진 것도 중소기업엔 타격이다. 중소법인은 대기업과 달리 회사채 시장에선 자금 조달이 어렵다. 5대 시중은행의 지난달 중소기업(개인사업자 포함) 대출 잔액은 662조2290억원으로, 전월 대비 3조7318억원 감소했다. 지난해 월별 기준으로는 처음으로 대출 잔액이 쪼그라들었다. 여기에 원자재를 수입하는 중소기업은 고환율(원화가치 하락)로 한 달 새 1달러당 70원 넘게 비용 부담이 늘었다.
재무 건전성에도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말 기준 중소기업 연체율은 0.7%로 1년 전보다 0.15%포인트 급등했다. 지난해 11월까지 전국 누적 법인 파산 신청 건수(법원통계월보)는 1745건으로 이미 2023년(1657곳)을 넘어섰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자를 깎아주는 단기적인 지원보다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영업 환경을 개선하는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며 “동시에 경영 정상화 가능성이 희박한 좀비 기업의 구조조정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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