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국민의 금도로 패전 일본국민 대하자" 바깥뜰서 1시간 강연 [김성칠의 해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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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덥고 개다.
아침 서늘한 시간을 이용해서 〈초당(草堂)〉의 번역을 시작하였다.
[해설 : 강용흘(xxxx-xxxx)의 자전소설 Grass Roof(1931)가 필자의 번역으로 1946년 정음사에서 〈초당〉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강용흘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1919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자리 잡고 살았다.]
천만뜻밖의 일로 조합의 유(劉) 김(金) 양 서기가 치안을 방해한다는 혐의로써 제천 치안대(일본인의 무기를 인수한 전 경관대)에서 체포하러 온다는 소문이 있고 직원들끼리 수군수군하더니 피신하는 것이 좋다고 하므로 내가 좋도록 하겠으니 안심하라고 이르고 주재소로 나왔다는 치안대를 만나러 갔다.
마침 고개에서 이리로 오는 정(鄭) 순사를 만나서 사유를 물으니 17일 독립만세의 기(旗) 행렬 때 장평(長坪)으로 몰려가서 주재소를 때려부수라는 말로 군중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평소의 기질로 보아 그럴 리도 없으려니와 만일에 그러한 일이 있었더라도 나의 불민한 소치이니 내가 책임을 질 것이요, 기어이 누구를 잡아가야겠거든 나를 잡아가라고 했더니 그러면 나에게 사건을 맡기겠다 하므로 저윽이 안심할 수 있었다.
일부 직원 중에서 다른 곳 금융조합은 전부 문을 닫고 일을 보지 않으니 우리도 그리하자는 발언이 있었으나 이 과도기가 언제까지 계속할지 모르는 일인데 무턱대고 노는 것이 불가할지며 또 이것이 난리가 아니고 우리가 앞으로 더 훌륭하게 살아가자는 판국이니 새 명령이 내릴 때까지 질서정연하게 일을 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직책일지며 또 예금자에 대해서도 현금의 제약으로 요구를 전적으로 수응(酬應)하지는 못할망정 그 사유나 곡진하게 일러주고 또 꼭 절박한 사정이 있으면 다문 얼마라도 보아주는 것이 좋지, 아주 문을 닫아버리면 일반의 불편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남의 조합이 그러하다고 함부로 거기 따라갈 필요는 없으니 우리는 평정한 마음으로 일을 보아 가자고 일렀다. 이 지방만 하더라도 다른 모든 기관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기능이 정지되어 있는 이때 우리가 이렇게 안온하게 복무할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오전의 면민대회에 나갔더니 일부에서 기어이 나의 출마를 요청하고 위원장의 후보로 세웠으므로 나는 이 지방 사정에 몽매할뿐더러 그 그릇이 아니니 추천을 사퇴하겠다고 발언했으나 면과 면민을 위해서 초지(初志)를 굽혀달라는 등 물의(物議)가 많아서 대 파란을 자아내었다. 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비추어보아서 본인의 사피(辭避)를 무시하고 억지로 입후보시키는 법이 없으니 동진(東震)공화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옹호를 위해서도 내 의사를 존중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낮에 이선호(李先鎬) 군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글월; 久霖快霽 喜氣新生(오랜 장마가 깨끗이 걷히고 기쁜 기운이 새로 일어나다.)
오후엔 선호 군과 여러 가지 이야기.
간밤에 전 순사 임순경(林淳敬) 씨도 와서 개탄하는 모양이었지만 최근 여러 사람이 치안의 문란에 대해서 민족의 소질(素質)을 운위하는 바 있었으나 나는 그때마다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를 들추더라도 이와 같은 정치의 진공 상태에 놓여서 이만치 질서정리(秩序整理)한 예는 별로 없으니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비관은커녕 낙관하는 바이며 40년 행악(行惡)한 저네들의 퇴장에 있어서 가지가지 인정에 넘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음은 조선사람의 천성이 순하디 순한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8월 21일 개고 덥다.
아침에 전 구학(九鶴)역장이 찾아왔었다. 해쓱한 그 얼굴에 기쁨이 넘치었다.
오전, 제천 행.
건국준비위원회의 윤곽과 그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매신(每申, 매일신보)에서.
은행 지점에 이종덕(李鐘悳) 씨를 만나서 앞으로 당파의 걱정을 하기에 정당(政黨)은 얼마가 있어도 좋은 것이며 이조시대에 붕당의 화(禍)가 심한 것은 국제관계가 없기 때문에 국민의 감정이 내공(內攻)하기 때문일 것이요 앞으로 대외관계가 복잡해지면 그러한 감정의 내공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낮에 나와서 오후는 봉양면 치안유지위원회에 참석, 교육부장이란 자리가 억지로 떠다맡겨졌다.
8월 22일 개고 덥다.
아침부터 면사무소와 조합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느라고 바빴다.
낮에는 박노창(朴魯昌) 씨를 모셔다 점심을 같이 먹다. 식후에 만주(滿洲)에 망명하던 시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마른번개 하더니 면사무소 창고 기둥에 낙뢰(落雷). 처음으로 보았다.
저녁때는 면에서 조선의 노래를 합창
1.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터전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예 사는 우리 삼천만
빛나도다 그 이름 조선이로세
2. 보아라 이 동산에 날이 새며는
삼천만 너도나도 함께 나가세
길러온 힘과 맘을 모두 합하세
우리들의 앞길은 탄탄도 하다
8월 23일 개고 덥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우리들이 당장 배워야 하고 앞으로 우리들의 자자손손이 배워나갈 우리의 학교를 지키자.
앞날의 희망을 바라고 온인자중(穩忍自重)!
실력의 함양에 힘쓰고, 함부로 경거망동 말자.
보이라! 대국민(大國民)의 금도를.”
하는 등의 삐라를 써붙였다.
학교에 가보니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학교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청소에 힘쓰도록 하였다.
면 치안유지회의 전 면직원 전부가 집단사직하는 기회에 나도 교육부장의 직을 내놓을까 했더니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8월 24일 개고 덥다.
〈초당〉의 인용문 “隣國相望 鷄狗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이웃나라들이 서로 바라보며 개와 닭의 소리가 서로 들리는데 사람들은 늙어 죽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오가는 일이 없다)”의 구절을 찾으려고 노자 도덕경(老子 道德經)을 들추다가 내가 학병 문제 때 마음의 한쪽 기둥이 되었던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也. 天地尙不能久 而况於人乎.(거센 바람이 아침내 가지 않고 쏟아지는 비가 하루를 다하지 않는다. 누가 이러한가? 천지다. 천지의 일도 오래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랴?)”의 구절을 보고 감개무량하였다.
치안유지회엔 아침에 잠시 나갔다. 부락 강연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었으나 무좀으로 보행이 곤란하다고 사절하였다.
낮에는 하야사카 씨가 찾아와서 그네들의 답답한 심지(心志)의 일단을 토로하고 자꾸 눈물이 쏟아질 듯 울먹울먹하므로 응대에 난처하였다.
오후의 신문에는 미국군(米國軍) 동경만 진주(進駐)의 보(報).
8월 25일 개고 덥다. [오늘부터 바람이 선선하고 완연히 생량(生涼)한 듯]
이중연(李重淵) 씨가 매일신보를 가져와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처음으로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밤에는 열여드레 달 밝기를 기다려서 윤태원(尹泰遠) 씨의 바깥뜰에 장평리 1-2구 사람들을 모아놓고 치안유지회의 일원으로써 한 시간 동안 강연하였다. 요지는
1. 너무 기뻐서 흥분하지 말고 오늘서부터 곧 실력을 길러서 세계에서 으뜸가는 나라를 만들 일
2. 사사로운 감정을 격발시켜서 동포들끼리 서로 티각태각하는 일 없이 삼천만의 최후의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낙오자가 없도록 할 일 ㈜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 보라. 우리들 모두 얼굴이 뜨뜻할 과거를 지니지 않았는가. 오십보이소백보(五十步而笑百步)로 대일(對日) 협력자를 탄하지 말고 잘 타이르고 북돋워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훌륭한 국민이 되도록 하자.]
3. 대국민의 금도로 일본국민에 대할 것 [일본이 여기서 집권(執權)했을 때는 모두 그 앞에 가서 허리를 굽신거리다가 이제 패전국민이 되어서 퇴각하는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다. 모든 과거의 잘못은 물에 흘려버리고 따뜻한 마음씨로 그네를 보내자. 보따리 둘러메고 물러가는 그들이 아니냐.]
4. 유언비어에 귀를 기울이지 말 일
5. 식량 사정을 잘 살펴서 이 어려운 단경기(端境期)를 웃으며 지날 일
6. 부락치안대를 조직해서 우리들의 마을은 우리들의 손으로 고이 지켜 신정부에 넘길 일
7. 내일부터라도 곧 야학을 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가갸거겨를 익혀서 세계의 문명국민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할 일
8. 일본에 가 있는 조선사람은 5백만이나 되어서 수송관계상 모두 한꺼번에 속히 올 수는 없는 일이니 아들, 조카를 일본에 병정으로 혹은 징용으로 보낸 이들은 너무 조급하게 기다리지 말고 더욱이 날마다 정거장에 나가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애태우지 말 일
9. 40년의 근심걱정을 다 털어버리고 가슴에 벅찬 희망을 안고 살아나가자. 앞으로는 삼천만 동포가 600만 석의 쌀을 먹게 되니 떡을 해먹어도 좋고 술을 빚어먹어도 좋을 것이다.
8월 26일 개고 덥다.
연박(硯朴) 가서 신(辛) 씨의 과수원 구경하고 아이들 데리고 비루박달로 고기 잡으러 갔더니 고기는 어제 제천 사람들이 약을 풀어서 다 잡아버렸으므로 없다기에 김한구(金漢九) 씨 댁과 박둔서(朴遯緖) 씨 댁에 놀다 왔다.
이중연 씨 오후 6시 차로 출발.
조선은 미-소(米-蘇) 양군이 점령한다는 경일(京日, 경성일보)의 뉴스. 분할하는 일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마음속에 빌건만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해설 : 해방 당시 발행되고 있던 신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모두 총독부 발행이었으나 일본어로 나온 경성일보에 비해 조선어로 나온 매일신보는 조선의 관점을 많이 비쳐보였다.]
조필환(曺必煥) 씨 방에서 레코드를 듣노라니 하야사카 씨의 어린 딸들이 와서 듣는 양이, 그리 보아서 그런지 맥이 없어 보이고 한동안 푸르던 서슬에 비기어 어쩐지 눈물겨워 보여, 이도 한 감상(感傷)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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