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할부 계약 같은 인생…돌아온 세일즈맨 박근형에 울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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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두번째 시즌이 지난 7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해 오는 3월 3일까지 공연한다. 사진은 초연(2023)에 이어 7일 개막 공연에서 주연을 맡은 박근형의 모습. 사진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평생을 바친 회사에선 퇴물 취급 받는다. 피땀 흘려 할부금을 부은 자동차‧냉장고는 할부가 끝날 때면 고물이 돼 있다. 환갑이 넘은 세일즈맨 윌리 로먼의 현재다. 한번만 더 돈을 내면 25년만에 주택융자가 끝나는 낡아 빠진 이층집까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을 가져봤으면 좋겠다”는 그의 자조 속엔 빈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삶도 포함돼있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시즌2 #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개막

“이 회사에서 34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에요. 알맹이만 빼놓고 껍질로 내버리는 겁니까?”(윌리 대사 중)

현대 희곡 거장 아서 밀러(1915~2005)의 대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2년 만에 돌아왔다. 2023년 국립극장에서 초연(연출 신유청)해 매진 사례를 이룬 명작의 귀환이다. 지난 7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서 두번째 시즌(연출 김재엽)이 개막했다.

"할부계약 같은 인생" 76년 전 세일즈맨에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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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두번째 시즌에선 배우 손병호(사진)가 타이틀롤로 합류해 박근형과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사진은 개막 직전 드레스 리허설 때 모습이다. 사진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은 2023년 타이틀롤을 맡아 7년만에 무대 복귀했던 배우 박근형(85)도 돌아왔다. 영화·드라마 속 '회장님 전문 배우'가 자본주의의 말단으로 변신했다. 같은 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까지 연속 매진 사례를 기록한 그가 이번엔 배우 손병호(63)와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아내 린다 역은 초연의 예수정(70)에 더해 손숙(81)이, 큰아들 비프 역 이상윤‧박은석 등이 새롭게 합류했다.

1949년 브로드웨이서 초연한 원작은 미국 대공황시기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그려 퓰리처‧토니‧뉴욕연극비평가상 등 3대 연극상을 석권했다. 이를 충실히 재현한 내용이 여전히 공감 간다는 평가다. “부모·자식간의 진실한 소통을 소홀히 하고 금전만이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 윌리 로먼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됐다”, “할부 계약처럼 사는 우리 현생. 할부가 끝나면 다시 고장 난다는 대사가 마음을 후벼 판다” 등 인터파크 예매관객 평가도 10점 만점에 9.8로 높다.

아서 밀러가 사업가 삼촌 죽음 계기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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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두번째 시즌은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초연 때보다 무대가 객석과 가까워졌다. 배우들의 동선도 역동성을 더했다고 김재엽 연출은 설명했다. 사진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전작 ‘자본3: 플랫폼과 데이터’(2023)에서 플랫폼 산업 시대 노동성을 고찰하는 등 역사‧경제를 주제로 동시대를 다뤄온 김재엽 연출이 시즌2에 합류하며 한층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무대 동선 배치도 초연 때보다 객석과 가까워졌다. 극중 회사 월급이 끊긴 채 물품 판매 수수료만으로 살아가는 윌리의 모습에선 현 시대 자영업자가 겹쳐진다.

9일 본지와 통화에서 김 연출은 “‘세일즈맨의 죽음’이 당시로선 다큐에 가까운 르포 문학이었다. 아서 밀러가 실제 대공황 때 자신의 삼촌이 사업에 실패해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썼다고 알려졌다”면서 “경제 위기가 오면 가족이 총체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고 말했다.

박근형 전통 아버지상, 손병호 요즘 부모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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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 베네덱 감독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두번째 시즌에서 주인공 부부를 연기한 손숙(왼쪽부터), 손병호. 가부장적인 윌리가 린다를 쥐고 사는 듯이 보이지만, 실질적으론 린다가 집안 경영자로서 윌리의 밥벌이를 채찍질하는 이중적 부부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축소판처럼 다가온다. 사진 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김 연출에 따르면, 박근형‧손숙 페어는 자식에 헌신적인 전통적 부모상을 떠오르게 한다. 손병호‧예수정은 친근하고 위트 있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감이 숨 막히는 억압으로 작동하기도 하는 요즘 부모 세대를 연상시킨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다움’을 강조한 교육이 오히려 억압으로 작용하는 대목도 한층 부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이자 명문대 유망주였던 큰아들 비프는 34살이 된 지금도 텍사스 농장에서 푼돈만 버는 떠돌이다. 직장에 다니는 둘째아들 해피(김보현‧고성호)는 방탕하게 산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사업수완 좋은 큰형을 동경하며 자란 윌리는 실패한 자식농사를 자책한다.

비루하게 늙어가는 몸뚱이에 갇힌 채, 그는 자꾸 과거로 도피한다. 아들들이 아직 창창한 10대였고, 윌리 자신도 큰형을 따라 알래스카에 가서 사업하길 꿈 꿨던 그 시절 장면이 암울한 현실에 불쑥불쑥 백일몽처럼 끼어든다. 과거의 망령들과 혼잣말처럼 대화하는 윌리의 모습은 남들 눈엔 영락없이 정신줄을 놓은 노인이다.

"단순 비극 아냐, 가족 의미 새롭게 보는 작품"

그러나 가족 중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린다는 평생 꿈꿔온 내 집 마련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남편의 정신적 붕괴를 외면하려고만 한다. 윌리 역시 아들들에게 물려줄 게 없는 삶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비프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게 두렵기만 하다. 가족의 불통 속에 예고된 비극이 시한폭탄처럼 닥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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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은 영화로도 수차례 만들어졌다. 왼쪽은 배우 더스틴 호프만이 주인공 윌리, 존 말코비치가 아들 비프 역을 맡은 1985년 영화, 오른쪽은 라즐로 베네덱 감독의 1951년작 국내 개봉판 포스터다. 사진 왓챠, 국제극장

김 연출은 “아버지나 아들, 어머니가 아니라 개개인으로 마주하면 많은 게 이해될 수 있다. 가족이 필요한 공동체지만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란 걸 인식하고 서로간의 ‘거리’를 만들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면서 “단순히 비극이 아니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보게 하는 게 이 작품의 큰 미덕”이라 짚었다.

박근형 "삶의 본질에의 위로와 성찰 나눠 영광" 

초연과 달리 각 배우가 무선 마이크를 착용하게 됐음에도 일부 배우의 대사가 웅얼거리는 발음 탓에 잘 들리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이를 제외하면,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 내공이 삶의 무게를 호소력 있게 실어내는 작품이다. 시즌2 첫 공연 후 박근형은 “‘세일즈맨의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 그들의 꿈, 가족 간의 갈등과 같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이야기”라며 “삶의 본질에 대한 위로와 성찰을 나눌 수 있어 영광”이라 소감을 밝혔다.
공연은 오는 3월 3일까지. 상영시간은 인터미션 15분 포함 180분. 14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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