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 월급쟁이의 죽음…“마음을 후벼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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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바친 회사에선 퇴물 취급 받는다. 피땀 흘려 할부금을 부은 자동차·냉장고는 할부가 끝날 때면 고물이 돼 있다. 환갑이 넘은 세일즈맨 윌리 로먼의 현재다. 한번만 더 돈을 내면 25년만에 주택융자가 끝나는 낡아 빠진 이층집까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을 가져봤으면 좋겠다”는 그의 자조 속엔 빈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삶도 포함돼있다.
“이 회사에서 34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에요. 알맹이만 빼놓고 껍질로 내버리는 겁니까?”(윌리 대사 중)
현대 희곡 거장 아서 밀러(1915~2005)의 대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2년 만에 돌아왔다. 2023년 국립극장에서 초연(연출 신유청)해 매진 사례를 이룬 명작의 귀환이다. 지난 7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서 두번째 시즌(연출 김재엽)이 개막했다.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은 2023년 타이틀롤을 맡았던 배우 박근형(85)도 돌아왔다. 이번엔 배우 손병호(63)와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아내 린다 역은 초연의 예수정(70)에 더해 손숙(81)이 합류했다.
1949년 브로드웨이서 초연한 원작은 미국 대공황 시기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그려 퓰리처·토니·뉴욕연극비평가상 등 3대 연극상을 석권했다. 이를 충실히 재현한 내용이 여전히 공감 간다는 평가다. “할부 계약처럼 사는 우리 현생. 할부가 끝나면 다시 고장 난다는 대사가 마음을 후벼 판다” 등 인터파크 예매관객 평가도 10점 만점에 9.8로 높다.
전작 ‘자본3: 플랫폼과 데이터’(2023)에서 플랫폼 산업 시대 노동성을 고찰했던 김재엽 연출이 합류하며 한층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무대 동선 배치도 초연 때보다 객석과 가까워졌다. 극중 회사 월급이 끊긴 채 물품 판매 수수료만으로 살아가는 윌리의 모습에선 현 시대 자영업자가 겹쳐진다. 지난 9일 통화에서 김 연출은 “‘세일즈맨의 죽음’이 당시로선 다큐에 가까운 르포 문학이었다. 아서 밀러가 실제 대공황 때 자신의 삼촌이 사업에 실패해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썼다고 알려졌다”면서 “경제 위기가 오면 가족이 총체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고 말했다.
미식축구 유망주였던 윌리의 큰아들 비프(이상윤·박은석)는 34살이 된 지금 농장에서 푼돈을 버는 떠돌이다. 둘째아들 해피(김보현·고성호)는 방탕하게 산다. 윌리는 실패한 자식농사를 자책하며 자꾸 과거로 도피한다. 암울한 현실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과거의 망령과 대화하는 윌리의 모습은 남들 눈엔 영락없이 정신줄을 놓은 노인이다. 그러나 가족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린다는 평생 꿈꿔온 내 집 마련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남편의 정신적 붕괴를 외면하려고만 한다. 가족의 불통 속, 예고된 비극이 시한폭탄처럼 닥쳐온다.
초연과 달리 배우들이 무선 마이크를 착용했음에도 일부 배우의 대사가 웅얼거리는 발음 탓에 잘 들리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이를 제외하면 베테랑 배우들의 내공이 삶의 무게를 호소력 있게 실어내는 작품이다. 시즌2 첫 공연 후 박근형은 “‘세일즈맨의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꿈, 가족 간의 갈등 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삶의 본질에 대한 위로와 성찰을 나눌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3월 3일까지. 14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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