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똑똑한 예외" 여성 과학교수가 MIT 방마다 줄자로 재면서 세상에 드러낸 것[B…

본문

17383010131642.jpg

책표지

숨겨진 여성들
케이트 제르니케 지음
정미진 옮김
북스힐

분자생물학자 낸시 홉킨스(1943~)는 여성 차별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첫째 입학. 과거 하버드 대학교는 여성을 받지 않았으므로 낸시는 래드클리프 대학교에 가야 했다.

둘째 취직. 여성을 채용하는 대학이나 연구소가 없었다. 은사인 제임스 왓슨의 추천서조차 무력할 때가 많았다. 셋째 비공식 대화. 남성 과학자들의 아이디어 교환은 학회 발표가 아닌 사교 중에 일어나는데 여성은 거기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낸시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교수가 된 이상, 셋째 문제만 노력으로 보충할 일로 여겼다.

17383010133297.jpg

왼쪽부터 살바도르 루리아, 낸시 홉킨스, 데이비드 볼티모어. 1980년대 MIT 암 연구센터에서 촬영된 모습이다. 살바도르 루리아는 1969년, 데이비드 볼티모어는 197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다. [사진 북스힐]

미국 언론인 케이트 제르니케(1968~)의 논픽션 『숨겨진 여성들』은 비정치적이고 온건한 성품의 여성 과학자가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느끼게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제목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이 책은 사실상 낸시 한 사람의 전기이다. 원제는 '예외들: 낸시 홉킨스, MIT, 여성 과학자를 위한 투쟁'(The Exceptions: Nancy Hopkins, MIT, and the Fight for Women in Science). 여기서 예외란 남성들이 여성 과학자에게 태연히 하곤 했던 말, ‘과학자가 될 정도로 예외적으로 똑똑한 여성’을 가리킨다.

다음은 낸시가 MIT 교수가 된 뒤 20년간 경험한 것이다. 첫째 의사결정. 낸시는 같은 과의 교수 임용조차 자기를 빼놓고 처리하는 것을 알게 된다. 둘째 도둑질. 동료가 업적과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데 질린 낸시가 이를 학과장에게 말하자, 그는 자기도 늘 당하는 일이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여자의 것을 훔치는 게 훨씬 부담 없고 쉬운 것 같았다. 셋째 공간. 같은 층을 쓰는 교수가 점점 낸시의 공간을 빼앗아간다. 해결을 요구하다가 낸시는 모든 남성 교수들이 자기보다 두 배 이상의 공간을 쓰는 걸 알게 된다.

넷째 급여. 낸시의 봉급이 가장 적다. 이건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된다. 다섯째 보조금. 학과에 들어오는 보조금 배분에서 그녀의 몫은 없다. 여섯째 강의. 강의 평가 점수가 높아도 다른 사람이 낸시의 강의를 빼앗는다. 심지어 강의를 빼앗아간 교수들은 자기들 명의로 교과서까지 내려 했다. 낸시가 만든 강의인데도 말이다. 일곱째 거짓말. 이 모든 문제를 따지러 갈 때마다 들어야 했던 뻔뻔스러운 거짓말들.

학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더 버티기 힘들어진 낸시는 변호사를 찾아간다. “아 그건 차별이네요.” 낸시는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낸시는 이 말의 효용을 즉시 알게 된다. ‘차별’이라는 말을 꺼내면 남자 교수들은 건성으로 듣다가 갑자기 진지해진다.

17383010134873.jpg

1999년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에 실린 MIT 여성 과학 교수들의 모습. 당시 이들의 보고서는 'MIT의 여성들이 여성 학자들을 위한 운동을 일으키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사진 북스힐]

낸시는 원래 개인적인 의견서를 학교 당국에 제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초안은 동료 여성 교수의 열렬한 반응과 조언에 힘입어, 결국 여성 교수 다수가 참여한 보고서로 발전되었다. 1994년 MIT 당국은 이를 접수했고, 1999년 이 보고서의 존재가 언론에 알려지자 MIT는 “조직적 여성 차별”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당시 보스턴에서 이를 취재했던 기자가 이 책의 저자이다.

낸시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천천히 진행되다가 중반부터 갑자기 사건이 쏟아지는 느낌이다. ‘MIT 성차별 인정 사건’에 집중하고픈 독자는 중반부터 읽어도 될 것이다.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학계는 공격성과 이기심이 보상을 받는 곳이라는 것. 거기서 여성이 고독하게 실력으로 버티려 하는 건 허망한 꿈이라는 것.

곤란한 상황에서도 낸시는 과학자였다. 어느 날 그는 모든 사람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건물에 잠입했다. 들킬까 봐 불도 켜지 않은 채, 자를 들고 각 사무실, 실험실의 크기를 쟀다. 몇 주에 걸쳐 스파이처럼 어둠 속에서 건물 모든 방의 크기를 쟀다. 낸시가 “평균보다 넓은” 공간을 쓰고 있다는 학과장의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낸시의 줄자는 MIT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2,425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