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화적 과학자들 이후 백년, 현재로 이어지는 '양자'의 유산[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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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역사
데이비드 카이저 지음
조은영 옮김
동아시아
학생 시절 양자역학 수업을 듣다 보면 공부를 하는 중인지 아니면 그리스로마 신화나 삼국지연의를 보는 것인지 헷갈리곤 했다.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드브로이, 슈뢰딩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 위대한 과학자들의 영웅담에 매료되었다. (잿밥에 정신 팔렸으니 시험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런 신화적인 시대와 지금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지?”
이 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이야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시대, 다시 말해 1920년대 중반의 양자역학 형성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거의 백 년 사이에 물리학의 폭과 깊이 그리고 활동 영역은 엄청나게 팽창했다. 신화시대와 지금을 잇는 거대한 그물망에서 한 주제나 한 시대를 골라내서 쓴 좋은 이야기는 여럿 있다. 이번 세기 들어서는 우리말로도 이강영의 『LHC,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사이언스북스)처럼 어디에 내놓아도 뿌듯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훌륭한 이야기들 모두가 어떻게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이는지는 웬만한 과학 애호가도 그 어떤 과학사가도 그려내기가 쉽지는 않다.
데이비드 카이저의 『양자역학의 역사』는 그런 갈증을 풀어가는 열쇠 노릇을 한다. 언뜻 양자역학 통사라는 인상을 주는 우리말 제목과 달리, 통사도 아니고 신화시대 이야기를 반복하지도 않는다. 원제(Quantum Legacies)를 풀이하자면 양자역학의 유산들이 현재까지 풀려 나온 모습을 뜻하기도 하고, 신화시대 이후 몇몇 역사적 덩어리(양자, 즉 Quantum)들이 물리학의 지금 현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 카이저는 미국 MIT의 현역 물리학자 겸 역사가인데, 평이한 문체를 구사하다가 느닷없이 묘한 중의법 문구를 던지곤 한다.
모두 17개의 길지 않은 에세이로 그런 덩어리들을 이야기하는데, 신화시대의 마지막 등장인물인 폴 디랙(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고, 반물질의 존재를 예언했다)부터 금세기 중력파 탐지까지를 다룬다. 마지막 18장은 스티븐 호킹을 기리는 짤막한 회고담이다. 이 책에서 가장 ‘학술적’인 글인 부록은 미국 내 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자 수 증감(1970년과 1990년대 초, 두 번의 피크가 있었다)이 물리학계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에세이들은 대체로 신화시대 이후 중요한 주제나 장면이 물리학 내적 논리와 물리학 바깥의 사정이 엮여서 전개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예컨대 중성미자의 진동을 발견한 폰테코르보의 기이한 인생사는 기초 연구와 핵무기 개발 사이를, 또 미국과 소련 사이를 진동했다.
상식을 깨는 내용과 지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예산을 아껴야 꾸준히 연구할 수 있을까? 외계문명의 전파신호를 탐색해보자는 SETI 프로젝트는 비용을 아껴서 기존 시설을 활용했음에도, 미국 정부와 의회는 소액에 불과한 지원 예산을 끊어 버렸다. 신규 건설 예산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의회에 로비할 건설 하청업자들이 없었던 점도 작용했다.
또, 히피 문화나 신비주의가 반물리학적일까? 1970년대 중반 히피 문화나 동양사상 열풍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물리학계를 장악해가던 풍조-물리학은 더 정밀한 계산을 추구하는 분야라는 생각-를 무너뜨리고 물리학에는 뭔가 심오하고 가치 있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부활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단, 신비주의나 동양사상이 직접 물리학 내용에 기여한다는 환상은 어처구니없다고 밝혀졌다.)
물리학 바깥과 내부를 이렇게 엮어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재미는 있는데, 믿어도 될까 싶을 수도 있다. 믿어도 된다. 노년의 물리학자가 훌륭한 역사서를 남기는 일은 종종 있고, 물리학사 연구자가 물리학 연구논문을 쓰는 일은 아주 가끔 있지만, 젊어서 두 분야를 복수전공해서 각각 학위를 받고 꾸준하게 두 분야 모두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경우는 카이저가 거의 유일하다. 역사로서도 물리해설로서도 신뢰가 보장된 셈이다.
여러 물리학 서적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즐겁게 뒤적일 지난 백 년의 약도이고, 물리학을 전공했던 사람들에게는 “아하 이래서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구나”라며 추억과 악몽을 즐겁게 되새김질해볼 기회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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