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글이 세계 제일, 측우기 최초는 조선"…아이들이 신기해했다 [김성칠의 해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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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 교수(통계학, 전 고려대)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 박사(역사학)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9월 6일 비오다.
새벽부터 심한 설사, 어인 까닭인지.
낮에는 이재형(李載瀅) 군의 일가 되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백운면 산을 그 재벌이 하게 되었다니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은 것 같다.
[해설 : 후에 정치인으로 나설 이재형(xxxx-xxxx)은 1938년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했고, 필자가 금융조합 연합회 본부에서 근무할 때(1945년 12월에서 1946년 3월까지) 가장 가까운 동료로 나중의 일기에 나타난다.]
학교에 나가보았더니 선생들의 무책임, 무정견, 협량, 나태에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처럼 내부의 청소와 교재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도 아직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조합에서 원지(原紙)를 보내고 치안유지회에 가서 종이를 얻어주었지만 또 시킨 대로 할는지.
조합에선 내가 누워있는 동안에 유(劉)의 하는 일이 정신 나간 사람 같아서 사단이 층생첩출(層生疊出). 공연히 심화만 난다.
조합장 댁 문전에 군중이 모여들어 밤늦게까지 소란스럽고 불온한 듯하나 몸이 괴로워서 나가지 못하였다.
9월 7일 흐리다.
설사로 혜화의원에 갔더니 조(曺) 의사도 어제 사소한 일로 폭행을 당했다고 심기 대단히 불평한 모양이었다.
[학산리 천주교 측 일부의 책동]
일부에서 사발통문이 돌기를 이명구(李命求), 염수해, 박제훈, 한필수, 김상옥(金相沃), 남형우(南衡佑)를 징치해야 한다고. 민의가 곧 천의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 어려운 과도기에 우리 겨레끼리 상잔상해(相殘相害)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편집한 조선사상운동 조사자료 제1집을 다 읽다.
〈초당〉의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옮기다.
9월 8일 개다.
청주서 조선인 이사회의가 있다는 걸 윤필원 서기를 대행(代行)시켰다.
이선근(李瑄根) 씨의 〈조선최근세사〉 다 읽다.
조합에서는 오는 10일부터 매일 두 부락씩 선진저금(先陣貯金)을 내어주기로 통지를 내고 그 준비에 분주.
백운면의 임순태(林淳台) 씨 윤성(尹鋮) 씨 내방.
학교에 나가서 개교 준비 독려.
기미년의 공약 3장을 써붙이다.
1. 오늘날 우리들의 이 운동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尊榮)을 위해서의 민족적 요구이매 다만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뿐 결코 배타적 감정에 흐르지 말라.
2.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모든 행동은 무엇보다도 질서를 존중할지며 우리들의 주창과 태도는 어디까지든지 공명정대할 일.
9월 9일 개다.
신량(新涼)이 입교(入郊)에 등화(燈火)를 우가친(尤可親).
오전 중 서악영 군이 놀다 가다.
누가 그러던가. 우리는 요사이 밤낮 하는 말들이 전 같으면 붙잡혀 가서 병신 되도록 맞고 징역 살고 나와선 보호관찰소에 회부될 그러한 성질의 말뿐이라고. 하여튼 못하던 말들을 하게 돼서 얼굴에 그림자가 가셔졌다고.
9월 10일 개다.
아침 학교 개교식에 참석하여 아이들에게 독립이 되어서 무엇이 좋은가, 좋게 될까.
1. 이때까지는 너희들의 부모가형(父母家兄)들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를 남이 다 앗아 가지기 때문에 너희들은 굶주렸지만 앞으로는 배불리 먹고 공부할 수 있다.
2. 이때까지의 교육은 너희들이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모국어를 원수처럼 금지했는데 이로부터는 그 말로 배우게 된다.
3. 이때까지의 교육은 소학교나 시켜서 일본말이나 가르치고 일본혼(日本魂)이나 집어넣었지 고등교육은 될수록 거부했는데 앞으로는 학교가 많이 생겨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4. 이때까지는 너희들이 적령이 되더라도 남의 나라 병정이 되어서 남의 나라를 위해서 싸워야 했는데 앞으로는 우리나라 병정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
5. 이때까지는 일본사람이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해버려서 조선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쓰일 곳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힘과 재주에 따라서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좋은 일은 앉아서 가만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본시대보다 더 착한 학생이 되어서 더 훌륭한 학교를 만들고 나아가서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라. 앞으로 조선이 좋은 나라가 되고 안 되는 것이 오로지 너희들의 어깨에 메였나니 오늘부터라도 곁눈 팔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9월 11일 개다.
처녀수업. 아내와 기봉이 와서 참관.
단군기원 4278년이라는 것과 한글이 세계서 제일가는 글이라는 것, 군함과 활자와 측우기를 조선서 제일 먼저 만들었다는 이야기.
아이들의 신기하게 여기는 눈, 좋아하는 모양.
목계(牧溪)조합의 박봉래(朴鳳來), 김형태(金炯泰) 양씨가 서울 가는 길에 와서 들렀다.
서악영 군이 와서 천주교 측의 미군 환영사를 지어달라기 지을 줄도 모르려니와 내가 영어를 배워서 남의 나라 군대가 진주해 오는 글을 쓸 생각은 없노라고 말하였다. 비록 우리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약속하는 반가운 분들일지라도.
직원들 점심 쌀 구하느라고 오전 중 분주. 밤에는 그 현물을 확보하느라고 고심.
9월 12일 흐리다 비오다.
5-6년 여자반 수업.
막 수업을 끝마치고 나오려니 면민대회의 사람들이 모여 와서 또 위원장 운운 하기에 “나는 오늘 서울 갈 예정이다. 가면 며칠 될는지 알 수 없으나 다음에 와선 가족까지 데리고 가게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조만간 봉양면을 떠날 것이니 그리 알아달라.” 하고 나와버렸다.
나중에 들으니 대회에서 위원장 후보로 추천된 것을 김상옥(金相沃) 씨가 내 말을 전해서 면했다 하며 저녁때 학교 선생님들이 참으로 서울 가는가 하고 우중에 걱정들 하고 오셨기에 가렸더니 비가 밀막아서 못 간다 하고 웃었다.
9월 13일 비오다.
조합에 나가서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출납계에 현금 180여 원이 틀려서 장시간 고생하는 중에 잘못 내어주어서 그대로 받아갔던 장평리 박종진(朴鐘振) 씨가 호우를 무릅쓰고 도로 가져왔기 때문에 무사히 끝마쳤다. 조합이 돈을 찾게 되어서 기쁜 것보다도 조선민족의 도의 수준이 이처럼 높은 것이 무척 기뻤다.
새벽엔 잠 안 오기에 이불 속에서 연설할 거리를 생각해서 아침에 골자를 초해 두었다.
9월 14일 개다.
5-6학년 남자반에 시조를 가르치다. “이고 진 저 늙은이”와 “이 몸이 죽고 죽어”.
오후 원주 행.
내일의 개교식이 21일로 연기되었다니 나선 김에 서울로나 갈까보다.
원주조합 부이사 심방.
저녁에는 김 씨 집에 가서 대접받고 동양여관에 유숙.
밤에 이중연 씨가 신명여학교의 강령에 대해서 묻기 얼핏 생각나는 대로
“우리는 착한 조선의 딸이 되자
우리는 참된 조선의 아내가 되자
우리는 어진 조선의 어머니가 되자”
가 어떨까 하고 대답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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