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CES서도 난리났다…재벌 회장들도 주목한 탈모 샴푸의 비밀 [비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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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들어진 브랜드는 특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흔히 브랜드 정체성, 페르소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죠. 그렇다면 이런 브랜드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매혹적인 세계를 만들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카이사르도 피할 수 없었던 것. 동물 똥∙오줌을 머리에 발라봐도, 말 이빨과 곰 기름을 섞어 약도 만들어봐도 허탈하기만 했던 것. 그리고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 것. 바로 탈모입니다.
고대 이집트 의학서 『에베루스 파피루스』에 따르면 속수무책인 탈모를 ‘치료’하기 시작한 건 기원전 1550년입니다. 이후 산업혁명부터 인공지능 시대까지, 그동안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탈모는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5’ 첫날,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폴리페놀 팩토리’입니다. 이 회사는 현장에서 지난해 4월 출시한 탈모 예방 샴푸 ‘그래비티’를 선보였는데, 반나절 만에 준비한 샘플 1만개가 동이 났습니다. 세계 최대 벤처 투자사 ‘플러그앤플레이’ 등 국내∙외 벤처캐피털 50여 곳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미국 대형 유통 체인 ‘월마트’ ‘타겟’ 벤더사의 입점 제안도 받았다고 하네요.
이런 화제의 탈모 솔루션을 내세운 건 뜻밖에도 이해신 카이스트 화학과 석좌교수입니다. 연구는 안 하고 외부 활동만 하는 교수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국제학술정보기관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뽑은 전 세계 상위 1% 연구자(2018 Highly Cited Researcher)래요. 2007년 낸 그의 대표 논문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 평균 4회씩 인용되고요.
게다가 이번이 그의 첫 창업도 아니라고 합니다. 2010년 피 안 나는 지혈제를 만든 ‘이노테라피’를 시작으로 유전자 치료제 개발사 ‘글루진테라퓨틱스(2014)’를 공동 창업했고, 2021년엔 머리만 감아도 염색이 되는 ‘모다모다’ 샴푸 기술을 만든 거로도 유명해졌어요.
대체 무엇이 전 세계 상위 1% 과학자를 연쇄 창업의 길로 나서게 했을까요. 비크닉이 지난달 20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그 주인공인 이해신 교수를 만나 질문을 쏟아냈어요.
모든 해결책은 ‘홍합’에 있다…탈모 샴푸, 이렇게 탄생했다
Q. CES에서 큰 관심을 받았는데.
그 덕인지 요즘 제품을 입고할 때마다 당일 동나곤 해요. 홈쇼핑 방송 40분 만에 10억원 매출을 올렸고, 지난달엔 올리브영 입점 39분 만에 준비 제품이 다 팔렸어요. 브랜드숍 요청으로 제품 사인 행사도 하고 옵니다. 요즘은 대기업 회장들도 저희 샴푸를 안다고 해요.
Q. 회사 이름이 독특하다.
2002년부터 홍합을 공부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홍합 껍데기에 있는 접착 물질 ‘폴리페놀’을 연구했죠. 그래서 창업해서 만든 제품은 모두 폴리페놀 원리를 활용해 만든 발명품이죠. 이것으로 지혈제를 만들고, 피 안 나게 하는 주사기도 발명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폴리페놀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활용하고 싶어서 사명을 폴리페놀 팩토리로 정했죠.
Q. 폴리페놀 연구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때부터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약물을 투입하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보통 몸 안에 들어간 약은 여기저기 퍼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다 1981년에 출간된 한 논문이 결정적 계기가 됐어요. 홍합 표면에 있는 접착 물질에 관한 연구였는데, 이거다 싶었죠. 홍합 원리를 활용해 물속에서도 원하는 지점에 무언가 붙일 수 있다면 의학 분야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가령 암세포가 발생한 지점에 정확하게 약을 붙이는 식으로요.
Q. 그러다 왜 탈모 샴푸를 만든 건가.
언젠가 어머니가 염색할 때마다 눈이 시리고 두피가 따갑다는 고민을 털어놨어요. 그런데 폴리페놀에는 갈변 성분도 있거든요. 이걸로 일단 염색 샴푸 모다모다를 만들었죠. 자연스럽게 모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 시장에선 탈모가 가장 큰 이슈라는 걸 알게 됐어요. 탈모 예방의 핵심은 모발을 최대한 덜 빠지게 하는 거잖아요. 모발이 얇아지고 모공에 공간이 생기면서 탈모가 생기는 건데, 이 공간을 폴리페놀로 채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Q. 모다모다 제품 출시 이후 사건이 많았는데.
모다모다 출시 반년 만에 200만 개 이상 팔렸는데 바로 위기가 찾아왔어요. 식약처가 샴푸 성분에 위해성 문제가 있다며 판매 금지 조처를 내렸죠. 식약처가 미국 FDA에 요청한 검사에서 샴푸 성분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받았지만 어쨌든 갈변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2년간 기술 사용료를 받지 못해서 소송도 벌였죠.
무엇이 상위 1% 과학자를 창업의 길로 이끌었나
Q. 교수와 창업가 정체성을 다 가지고 있는데, 일과가 어떻게 되나.
하루하루가 전쟁터예요. 논문연구∙수업∙학생지도와 함께 샴푸 개발∙경영까지 하면 시간이 부족하죠. 방학인 요즘은 주 7일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 틈틈이 연구도 하죠. 이게 다 재밌어서 하는 거죠. 재미가 삶의 원동력이에요.
Q. 재미가 다인가.
의무감도 있어요. MIT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낼 때 지도교수였던 로버트 랭어(Robert Langer)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랭어는 뛰어난 학자이자 발명가이자 사업가예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지금까지 설립한 회사만 40곳이 넘고, 이중 상당수가 상장도 했어요. 그가 만든 대표 회사가 코로나 시기 중요한 역할을 한 백신 회사 ‘모더나’예요. 그는 아무리 좋은 연구를 해도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교훈을 줬어요.
Q. 스승한테 얻은 가르침을 학생들에게도 전달하고 있나.
화학과 수업시간에 기업활동(IR)을 시켜요. 예를 들어 질병을 한 가지 던져주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가상으로 창업하는 프로젝트예요. 당장 투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가정하는데, 학생들은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닌, 문제와 해결책, 시장성을 찾게 되죠. 저는 똑똑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에 가는 나라는 망조에 들었다고 생각해요. 공학 인재들이 창업해서 성공하는 사례를 만들고 싶고, 우리나라에도 테슬라나 구글 같은 세계적 테크 기업이 못 나올 이유는 없다고 자신합니다.
J 커브 그리는 신생 스타트업의 비결
폴리페놀 팩토리는 2023년 대전 동구 둔산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책상 두 개만 놓을 수 있었던 곳이 지금은 11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사무실로 커졌어요. 제품 출시 8개월 만에 매출 100억원을 올린 이 신생 스타트업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Q. 창업의 기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남들이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걸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보통 본인이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고 창업에 뛰어드는데, 이번 CES 현장에서도 그런 부스들을 봤고요.
Q. 소비자 니즈를 어떻게 발견했나.
기획 단계부터 많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요. 팀원들과 공병에 담긴 제품을 들고 미용실도 찾아다녔죠. 실제 후기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어요. 지금도 고객 민원 전화를 직접 받아요. 온라인 판매 채널에 올라온 쓴소리까지 다 읽고요. 소비자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이든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불만족했다면 그 원인을 집요하게 찾아야 해요. 저는 종종 30분 넘게 통화하면서 소비자 생활습관도 상담해요.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문제 원인과 해결책이 보여요.
Q. 소비자 목소리를 반영하기도 했나.
사실 그래비티가 처음부터 탈모 예방 샴푸였던 건 아니었어요. 머리가 풍성하게 보이는 볼륨 샴푸로 개발했죠. 그런데 수백명을 찾아다니며 시장 조사를 하다가 의외의 피드백을 받았어요. 머리가 안 빠진다는 거죠. 제품 출시를 늦추고 추가 임상 시험에 들어갔고, 일반 탈모 샴푸보다 머리카락 감소 현상이 적다는 걸 알게 됐죠. 잠재 고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Q.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준다면.
콘셉트로 사업하지 말아라, 그건 장난이라고 말해줘요. 과거처럼 아이디어만 가지고 비즈니스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어요. 만약 잘 되더라도 빠르게 대체되기 때문이죠. 본인만의 기술을 갈고 닦는 시간이 필요해요.
Q. 문과는 어떻게 기술을 찾나.
기술(technology)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랜 수련을 통해 무언가를 잘 다루게 되는 능력을 말하죠. 문과도 나름대로 기술을 찾을 수 있고, 어떤 분야든 본인이 속한 곳에서 꾸준히 훈련하다 보면 노하우를 얻어요. 만약 식당 창업을 생각한다면 식당 직원으로 들어가 수백 개의 양파를 썰어보는 경험을 해야 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폴리페놀 팩토리의 모토는 일상의 혁신이에요. 일상용품으로 생활의 질을 높이자는 거죠. 일단 지금은 그래비티를 비롯한 모발 상품 개발로 ‘헤어 사이언스’에 몰두할 계획이에요. 이미 모발 강도를 높이는 상품, 파마나 매직을 할 수 있는 제품, 모근 없는 모발 이식 등을 개발하고 있어요. 장기적으론 랭어 교수처럼 노년에도 왕성하게 연구 활동과 사업을 병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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