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설·시집 이어 헌법까지 필사한다…요즘 청춘들의 힐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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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0대 대학생이 X에 올린 필사 인증글. [사진 X 계정 '꼬직' 제공]

대학생 A씨(20대·여)는 한 달에 현대 소설·시집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한다. 특히 A씨는 일주일에 1~2번 읽은 책을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 기록을 남겨 소셜네트워크서비스 ‘X(옛 트위터)’에 인증 글을 올려서 유명세를 탔다. 일명 ‘문장 수집가’로 불린 A씨가 지난 2022년부터 3년간 꾸준히 필사한 책은 30~40권에 이른다.

A씨는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있는데, 반납 후에도 좋은 구절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필사를 시작했다”며 “필사를 하면 단순히 읽기만 할 때 놓쳤던 부분이 새롭게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글씨를 잘 쓰고 있는 게 맞나, 줄이 삐뚤진 않나 등 잡생각이 들다가도 어느새 필사에 몰입하게 된다”며 “다른 생각 없이 온전히 글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텍스트 힙(Text hip·활자 인쇄물을 읽는 것을 멋으로 여기는 유행)’ 인기가 최근엔 필사로 이어지고 있다. 독서를 통한 즐거움에서 직접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문화 콘텐트 플랫폼 ‘예스24’ 측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긴 어렵지만, 필사 관련 도서 판매량이 전년 대비 165.9%(약 2.6배)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서울 소재 오프라인 대형 서점들을 찾아가 보니 서점마다 곳곳의 매대 위에 소설·시·인문·역사·철학·예술 등 분야별 필사 관련 책이 배치돼 있었고, 종류도 다양했다. 과거엔 인문학 분야 필사 책이 대부분이었다면, 최근 노래 가사나 철학자의 격언 등으로 확장하는 분위기라는 게 업계 설명이다. 유명 밴드 데이식스의 노래 가사를 모은 『DAY6 가사 필사집』은 지난달 9일 예약 판매를 시작한 지 한 주 만에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예스24 관계자는 “전체 구매자 중 72%가 2030 세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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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서울 시내의 한 대형 서점에 필사를 주제로 한 책들이 매대에 진열돼있다. 김서원 기자

사회·경제 분야 책들도 필사 대상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책 『헌법 필사』가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게 대표적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 1월 셋째 주 기준으로 이 책을 구매한 독자층은 20대가 35%로 가장 많았고, 30대(32%)가 그 뒤를 이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로 인해 헌법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면서 책 품귀 현상까지 빚었다”며 “헌법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쓰면서 되새길 수 있는 필사 도서에 젊은 독자층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최근 『하루 한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를 구입한 회사원 장모(31)씨는 “베스트셀러라길래 필사에 관심이 생겼는데, 지친 일상 속 심신의 안정을 위해 매일 조금씩 필사에 도전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도 “‘느좋(느낌 좋은)’ 음악과 함께 필사하기가 요즘 나의 일상”이라거나 “짧은 문장부터 천천히, 친구들과 필사 챌린지를 시작했다” 등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필사스타그램’ ‘필사 챌린지’ 등 필사를 주제로 검색하면 100만 개 이상의 게시물이 나온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텍스트 힙 열풍이 여전한 가운데 각박하고 정신없는 세상 속 아날로그 감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며 “바쁜 일상에 쫓기는 와중에 단순하고 반복적인 손글씨를 쓰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위로를 받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문해력 저하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위기감을 느끼고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려는 행위로도 해석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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