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내 미래 없다" 초1때부터 엄마 간병…간도 기증한 21세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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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외출할 때 도와드리는 가족돌봄아동의 뒷모습. 사진 초록우산

'엄마를 간병하며 한순간도 나로 살아본 기억이 없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가족)돌봄도 그렇다. 한 어른을 한 아이가 어떻게 돌보겠는가?'

가족돌봄 15년째에 접어든 21세 '새벽'(가명) 씨가 어느 날 일기처럼 쓴 글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1 당시 시작한 돌봄은 성인이 돼도 매일 반복하고 있다. 평일엔 하루 8시간, 주말은 24시간 내내 집안일과 어머니 간병, 생계용 아르바이트 등에 매달린다.

['어린 가장'의 눈물]

가족돌봄아동에게 절망적인 건 돌봄의 굴레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새벽 씨처럼 가족돌봄아동이 가족돌봄청소년이 되고, 결국 가족돌봄청년에 이른다. 사실상 돌봄의 대상인 가족이 그들 곁을 떠나야 해방된다. 어릴 때 시작한 돌봄이 5년, 10년 길어질수록 괴로움은 가중된다. 유전병 어머니를 챙기며 간도 기증한 새벽 씨는 "중학교 때 잠시 집을 떠난 동안 엄마 건강이 악화했다"면서 "그때 내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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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외에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가족돌봄아동이 직접 설거지를 한 뒤의 모습. 사진 초록우산

성인 된 가족돌봄아동 "내 삶 벅차, 포기 생각도"

13세 미만 가족돌봄아동이 크면 어떻게 될까. 중앙일보는 청년이 된 가족돌봄아동 두 명을 지난달 심층 인터뷰했다. 새벽 씨, 그리고 돌봄 15년 차인 26세 '윤서'(가명) 씨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큰일을 겪다 보니 힘든 적이 많았고, 인생의 시계도 그때 여전히 멈춰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자주 쓰러지는 어머니와 12살 어린 동생을 돌보는 윤서 씨는 "대학생 때 같은 일을 겪었다면 조금이나마 나았겠지만, 초등학생 때 돌봄을 시작해 심리적 압박감 등이 훨씬 컸다"면서 "내 삶이 벅차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아 꾸역꾸역 버텼다"고 털어놨다.

교우 관계나 진로 준비 등에서도 점차 남들과 간격이 벌어졌다. 새벽 씨는 "엄마가 입원하면 병원에 머물러야 하니 출석 문제가 컸다. 늘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사과드린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곪아서 스스로 친구들과 (연락을) 차단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왕따'까지 당했다는 윤서씨는 "집안 사정 때문에 자존감이 낮다 보니 괴롭힘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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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동생을 간병하는 가족돌봄아동. 사진 초록우산

"가족돌봄인지 몰라" 주변서도 '당연하다' 압박

특히 이들은 힘든 현실에 체념·분노를 느끼면서도 돌봄을 일찌감치 '내 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가족을 돌보는 게 당연하다는 주변의 시선도 영향을 미쳤다.

밥 차리기, 설거지, 빨래, 청소, 동생 등·하교에 아르바이트까지…. '어린 가장' 윤서 씨에겐 지금도 할 일이 태산이다. 그는 "사실 얼마 전까지 가족돌봄이란 개념 자체를 몰랐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네가 가장이니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승현 초록우산 아동옹호본부장은 "효자·효녀로 대표되듯 국가가 아닌 가족의 돌봄을 당연시하는 사회 인식이 아동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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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기자

돈 없어 폰·학원 다 끊어…"지원 정책 잘 알려줘야"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 '미래'란 그다지 밝은 단어가 아니다. 새벽 씨는 "가족돌봄은 하면 할수록, 기간이 길어질수록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가장 무섭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윤서 씨는 "그나마 어릴 때는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15년째 돌봄을 하다 보니 희망 대신 실망만 쌓이고 있다"고 했다.

절실한 지원을 묻자 하고픈 말이 많았다. 새벽 씨는 "그나마 나는 기초생활수급 가구인데다 소셜 모금으로 엄마 수술비라도 지원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수급 대상이 아니거나 지원 정책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가족돌봄아동에게 복지 연계 서비스 등을 정확히 알려주고, 지원도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학창 시절 조금이라도 돈 아끼려 스마트폰을 없애고, 학원도 끊었다는 윤서 씨는 "기초수급 가구라도 생필품 사면 남는 게 없다. 가족돌봄아동에 추가적인 의식주 비용이 제대로 지원되면 심리적 어려움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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