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빨라도, 느려도 괜찮아요. 어디선가 여러분의 ‘빨간 사과’가 익어가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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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의 신인상 격인 ‘오페라 프리마’ 부문에서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이 대상에 선정됐다. 오페라 프리마는 작가의 첫 책에 주어지며, 한국 작가의 대상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희(맨 왼쪽)ㆍ진주 작가가 24일 책 속 주인공 지구ㆍ지호와 함께했다. 김현동 기자

24일 인천 송도 신도시의 한 고층 아파트, 볕 잘 드는 거실에서 지구(9)ㆍ지호(8) 형제가 빠끔 얼굴을 내민다. 속 깊은 형과 단발머리 동생, 동화책 속 그대로다.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도서출판 핑거) 속 시골집 다락과 버스 정거장은 없지만, 이야기의 출발점을 엿보는 기분이 됐다.

‘그림책 노벨상’ 볼로냐 라가치상 신인 대상 받은 진주ㆍ가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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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볼로냐 라가치 오페라 프리마 대상에 선정된 책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한 장면. 작가의 외갓집에 색종이로 세트를 구성한 뒤 필름 카메라로 촬영 후 드로잉을 추가했다. 사진 도서출판 핑거

볼로냐 아동도서전 사무국은 19일(현지시각) 올해의 라가치상 오페라 프리마 대상으로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진주 글, 가희 사진그림)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책의 이 부문 대상 수상은 처음이다. ‘아동 도서의 노벨상’으로 꼽히는 라가치상은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출간된 어린이 책을 대상으로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시상한다. 픽션(창작), 논픽션, 오페라 프리마, 코믹스, 토들러 5개 부문을 운영하며 부문별로 대상 1권과 우수상 2~3권을 선정한다. 오페라 프리마는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을 대상으로, 신인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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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의 신인상 격인 ‘오페라 프리마’부문 대상에 선정된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글 작가 진주(오른쪽)과 그림 작가 가희. 김현동 기자

책 속 지구가 태어나던 날, 할아버지는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지구ㆍ지호 형제는 비 오는 처마 밑에서, 나무 위에서, 얼음낚시를 하면서 빨간 사과가 열리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마침내 사과가 익었지만 지구가 주변의 도움 요청을 외면하지 못하는 새 빨리 내달린 지호 손에 사과는 돌아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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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의 버스 정거장에서 촬영한 책 속 장면. 마침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할머니가 모델을 서줬다. 사진 도서출판 핑거

첫 책으로 큰 상을 받은 가희(36·이가희) 씨는 ”그림책 제작 과정부터 그림책 세계의 사람들까지 모두가 처음이어서 실감이 안 날 정도“라고 말했다. "나무에 올라 사진을 찍는데 송충이가 튀어나와 울었어요"(지구), "후다닥 달리는 장면 찍느라 많이 뛰어야 했어요"(지호), 아이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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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의 신인상 격인 ‘오페라 프리마’부문 대상에 꼽힌 책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면』의 그림 작가 가희(왼쪽) 씨의 집에서 책 속 주인공 지구ㆍ지호, 글 작가 진주 씨가 만났다. 김현동 기자

서양화과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지만 이름을 내고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었다. 이웃 진주(46) 씨의 2년 전 제안이 시작이었다. 이미 두 권의 그림책을 발표한 진주 씨는 본인이 써둔 이야기로 함께 사진그림책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씨는 그길로 경남 사천의 외갓집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원본 그림책 제작을 위해 한 번, 출판사가 정해진 뒤 재촬영에 들어갔다. 이 씨의 두 아들부터 좀처럼 집에 없는 항해사 남편, 사천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던 할머니까지 책 속 모델이 됐다. 아이들의 조부모 네분은 촬영을 위한 색종이 세트를 붙잡고 있는 등 스텝으로 활약했다.

온 가족이 가내수공업 하듯 책을 만들었지만, 책 속 지구ㆍ지호는 삼촌ㆍ고양이와 사는 조손가정이다. 진 씨는 ”그림책에 당연한 듯 엄마·아빠가 함께 나오는 것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무거운 상처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없어도 책 속 형제들에게는 결핍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다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들에게 빨간 사과를 건네받은 지구의 마음이 나 같다. ‘그림책 계속해도 될까’ 번뇌할 때 들려온 수상 소식은 ‘그래 진주야, 좀 더 해 봐’ 하는 듯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아이든,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가는 아이든 어우렁더우렁 살다 보면 함께 ‘빨간 사과’를 먹을 날이 온다는 따뜻한 응원, 필름 카메라의 부드러운 색감, 자개장이 있는 시골집의 향수…. 책의 미덕은 ‘신인 대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유ㆍ초등생 대상 학원의 레벨테스트를 말하는 ‘7세 고시’, 코미디언 이수지 씨가 대치동 엄마의 교육열을 패러디한 ‘제이미 맘’ 영상이 화제인 세상. 저마다 다른 속도로 성장해 나가는 세상의 작은 것들에 보내는 응원을 담은 그림책이 너무 이상적인 것은 아닐까. 진 씨는 ”풀의 소리와 꽃의 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갈 수 있는 게 능력이 될 날이 올 것“이라면서도 ”지금 달려가는 아이들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꽃을 보고 싶어 꽃봉오리에 손 넣어 강제로 열지 않고 기다리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어른이고 싶다“고 말했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은 1963년부터 매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리고 있다. 62회를 맞는 올해는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열린다. 진주ㆍ이가희 두 작가는 시상식과 대담에 참석한다. 이들이 대담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

어린이 여러분, 또 여러 이름과 책임을 감당하느라 나를 잃을까 두려운 어른 독자분들, 보이진 않아도 어디선가 여러분의 빨간 사과가 익어가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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